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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7월 1일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분은 내게서 뭘 보실까?"(시편과 영화 4)
글번호 : 767    조회 : 81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7-06 12:41:51   
 
지난 주일(7/1) 설교문입니다. '시편과 영화' 주제의 시리즈 설교 네 번째로서 본문은 시편 136편이고 영화는 <데블스 애드버킷>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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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일 / 성령강림절 일곱 번째 주일
시편과 영화의 만남 4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분은 내게서 뭘 보실까?
시편 139:1-24

곽건용 목사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5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6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7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9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10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11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12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13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14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17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19 하나님, 오, 주님께서 악인을 죽여만 주신다면…!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거라." 20 그들은 주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며 주님의 이름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합니다. 21 주님,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으며 주님께 대항하면서 일어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22 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미워합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23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24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시편 139:1-24).

신학자들이 좋아하는 시편

오늘 읽은 시편 139편 역시 널리 알려진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특히 신학자들이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하느님의 ‘전지’(全知, omniscience), 곧 ‘하느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다.’는 교리와 ‘무소부재’(無所不在, omnipresence), 곧 ‘하느님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교리를 입증하는 증거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학자들이 고마워할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동시에 신학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시편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겠습니다.

이 시편 역시 지난 주일의 136편처럼 잘 짜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1절부터 6절에서는 하느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시다고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고 환히 알고 계신답니다. 그분은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멀리 있거나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할 것 없이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입을 열기 전에도 주님은 내가 하려는 말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은 나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손을 얹어 축복해주시니 주님의 깨달음은 놀랍고 측량할 수 없이 높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7절부터 12절까지는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느님, 곧 하느님의 무소부재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그분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냐면서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죽어서 가는 ‘스올’에 자리를 펴도 주님은 거기도 계신다고 했습니다. 동쪽 끝이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도 거기서도 주님의 손이 자기를 인도하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자기를 힘차게 붙들어 주시니 주님은 어디든 계시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셋째로, 13절부터 18절까지는 창조의 신비를 노래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주님께서 모태에서 자기를 짜 맞추셨고 오묘하게 빚어주셨으니 놀랍고 감사하다면서, 주님은 자기를 은밀한 곳에서 지으셨고 깊은 땅 속 같은 모태에서 자기를 조립하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이미 자기를 아신 주님의 생각이 얼마나 심오하냐면서 감탄을 터뜨립니다.

넷째는 악인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19절부터 22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악인을 죽여 달라고 청원합니다. 그들은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면서 물리쳐 달라고 비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인 자신에게만 원수가 아니라 ‘주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고 ‘주님의 이름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이므로 주님의 원수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과 주님께 대항해서 일어나는 자들을 자기가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노래했습니다. 다섯째로, 23절과 24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자기를 철저히 시험해 보고 자기가 뭘 염려하는지 알아달라고, 그래서 자기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청원하면서 노래를 마무리합니다.

신학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시편

이 시편은 몇몇 이유로 신학자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시편입니다. 첫째로 신학자들이 이 시편을 근거구절로 삼는 하느님의 전지(omniscience) 교리, 곧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교리가 여기서는 철저하게 시인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시인과 하느님의 ‘나와 너’(I-Thou)의 개인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바로 그 관계 말입니다. 이 시편의 등장인물은 시인인 ‘나’와 상대방 ‘당신’인 하느님,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악인들’입니다. 시편 전체를 통해서 유일하게 말하는 쪽은 시인인 ‘나’입니다. 하느님과 악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시인의 청원에 대해 아무 응답도 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악인들 사이의 차이는 악인들은 시인의 청원 대상이 아니라 제3자라는 데 있습니다.

이렇듯 시편은 ‘나와 당신’이라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시인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 시편에서 하느님은 ‘나를’ 살펴 아시고 ‘내가’ 어디 가도 거기 계시며 ‘내가’ 태아일 때부터 ‘나를’ 아십니다. 복수인 ‘우리’나 ‘공동체’ 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존재는 시야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시편에서 ‘하느님은 모든 걸 아신다.’라거나 ‘하느님은 어디나 계신다.’ 등의 ‘교리’(dogma)를 이끌어내는 게 정당한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시편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점입니다. 이 시편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개의 경우 19절 이하를 읽지 않습니다. 1절부터 18절까지만 읽는 겁니다. 거기까지는 매우 아름다운 내용이니까 그렇습니다. 19절부터 22절까지는 원수를 저주하고 심지어 죽여 달라고 청원하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내용입니다. 예배와 설교에서 이 대목을 다루지 않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원수지만 예배나 설교에서 그들을 죽여 달라는 내용은 읽고 싶지 않겠지요.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시편의 성격과 장르를 결정하기 때문에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 1절부터 18절까지는 ‘아멘!’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살펴보셔서 어디를 가거나 거기 계신답니다. 하늘로 올라가도 스올로 내려가도 거기 계신다니,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도 혼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뿐입니까, 하느님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나를 알고 계시고 태아였을 때도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그러니 19절 이하의 내용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시편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그럼 시인은 왜 이런 시를 썼을까요? 이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뭘까요?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시를 썼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원수 운운하는 19절 이하에 있습니다. 거기서 시인은 방금 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는 악인들을 저주하고 죽여 달라고 빕니다. 그들은 ‘악인들’이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원수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시인들에게만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고 ‘주님의 이름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이 시편을 쓴 이유는 자신이 이들 악인들에 의해 저주받고 하느님에게 고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쓴 노래가 바로 이 시편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내용은 ‘감사의 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탄식의 노래’입니다. 물론 19절 이하가 없었더라면 감사의 노래로 볼 수 있지만 19절 이하 때문에 ‘탄식의 노래’로 분류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예수님에게서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시인이 ‘원수’라고 부른 누군가를 저주하고 심지어 죽여 달라고까지 청원하는 이 시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구약은 역시 어쩔 수 없는 걸까요? 구약은 아무리 성경이라도 ‘옛 언약’일 수밖에 없고 ‘새 언약’인 신약의 예수님에 의해 교정되거나 극복되거나 뒤집어지는 게 옳을까요? 저는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원수’를 죽여 달라는 청원이 이 시편이 갖고 있는 문제는 전부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 못지않게 중대한 문제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물론 시인이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결국은 그 얘기입니다. 자기는 자신 있으니 자기를 구석구석 속속들이 살펴보시라는 것 아닙니까. 이런 태도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배치됩니다. 기독교 신앙고백 뿐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도 낯선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자신감과 당당하게 원수를 처벌해달라는 청원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결백에 대한 확신은 두 가지 결과는 낳았습니다. 첫째는 원수를 처벌해달라고 당당하게 청원해 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원수를 하느님의 원수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자는 곧 주님을 미워하는 자이고 자기 원수는 곧 주님의 원수라는 믿음은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자신 있게 자신의 무죄함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시인처럼 자기 개인의 원수가 만인의 원수요 하느님의 원수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은 시편 139편과는 다른 의미에서 나 자신의 들여다보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플로리다에서 소송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변호사 캐빈은 심지어 유죄라고 확신하는 피의자까지 무죄로 만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의 거대 투자회사에 스카우트되어 회사 사장 존 밀턴의 총애를 받습니다. 존 밀턴이라는 이름은 저 유명한 <실낙원>의 저자에게서 왔다고 추측됩니다. 데블스 애드버킷, 곧 ‘악마의 변호인’은 가톨릭 ‘성인’(聖人 sainthood) 추대 심사에서 후보자가 성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집요하게 주장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더 넓게는 한 의견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악마의 변호인은 모두가 찬성할 때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토론을 활성화시키거나 다른 대안이 있는지를 모색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캐빈은 뉴욕에서 플로리다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아내 메리 앤은 외로움과 원인 모를 공포에 사로잡혀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지경에 이르지만 캐빈은 아내의 상태를 무시하고 일에 몰두합니다. 어느 날 그에게 큰 사건이 주어지는데 그는 일을 진행하면서 의뢰인이 범인임을 알게 되지요. 게다가 주변사람이 죽어나가기까지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공에 대한 집착과 물질적 부에 대한 욕망, 그리고 존 밀턴에 대한 묘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건에 몰두하여 결국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메리 앤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캐빈의 어머니는 존이 캐빈의 아버지라고 밝힙니다. 그러니까 존과 캐빈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오래 전에 계획되어 치밀하게 추진된 일었던 겁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캐빈의 아버지이기도 한 존 밀턴은 악마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이름은 많다고 말하면서 캐빈의 자유로운 선택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캐빈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존은 심지어 캐빈의 아내가 입원했을 때 사건에서 손을 떼로 아내를 돌보라고 조언하기도 했지요. 물론 캐빈이 거절했지만 말입니다. 그는 사건을 끝낸 후에 아내를 돌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건을 포기했는데 아내가 낫는다면 아내를 미워할 것이라는 그럴듯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이유까지 들어가면서 말입니다. 캐빈과의 대결에서 존은 끊임없이 캐빈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캐빈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저는 여기서 영화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영화 서두의 재판 휴식 중에 캐빈이 화장실에 있을 때 그의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상상으로나마 일의 결과를 내다본 캐빈은 의뢰인 변호를 거부합니다. 악마의 유혹에 승리한는 걸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악마는 이번에는 기자로 변신해서 캐빈이 한 일은 최고의 특종이고 그는 최고의 스타가 됐다면서 인터뷰를 요청하자 이를 수락합니다. 악마가 캐빈의 욕망과 허영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시인은 왜 하느님께 자기를 살펴달라고 기도했을까?

한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과 그 사건과 무관하게 한 발 떨어져서 관찰하는 사람의 시선은 다를 수 있습니다. 관객에게는 캐빈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스스로에게도 파국을 가져왔음이 어렵지 않게 보이지만 당사자 캐빈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긴 타인의 진실은 눈에 잘 들어오지만 자기 자신의 진실은 잘 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 아닙니까. 이 영화는 법정영화이지만 다른 법정영화들과는 달리 지루하지 않고 숨 막힐 정도로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법정에서 가려져야 할 진실이 인간의 욕망이 혼합되어 진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쉽게 뒤집힙니다. 우리는 아프게도 이런 현실을 조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목격합니다. 법원도 믿을 게 못 됩니다. 법치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대법원과 대법원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이 집단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법의 정의를 짓밟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이쯤 되면 진실과 정의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진실을 규정하고 좌우하는 게 아니냐는 자조(自嘲)의 목소리가 나올 만합니다.

영화는 악을 존 밀턴이라고 하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그린다는 점에서 악에 대해서 고전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신약성서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악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서 인간을 타락시킵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제하는 인간관은 시인의 단순하고 순진한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얽혀 있습니다. 시인이 자신은 죄가 없고 따라서 하느님 편인 반면 자기의 원수는 악인이고 하느님을 적대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과는 달리 영화는 인간이 내면을 한층 더 복잡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시인의 인간관이 그렇게 순진하지만 않다는 사실은 마지막 두 절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인은 서두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샅샅이 살펴보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자기를 샅샅이 살펴봐 달라고 청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는 다시 한 번 자기를 살펴봐 달라고 탄원하는 걸까요?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노래의 서두와는 달라진 것인 아닌가 말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시편에 대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시인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고 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현대의 인간 이해는 과거와 비교해서 많이 발전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선을 행하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선은 행하지 않고 반대로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욕망이란 게 뭔지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스스로가 뭘 욕망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또한 왜 그걸 욕망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망의 문제에 있어서 딱 부러지는 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욕망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고 또 반대로 그것을 제한 없이 긍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화가 보여주듯이 가장 설득하지 쉬운 사람은 자기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자신을 살펴달라는 기도를 하느님께 끊임없이 드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욕망하는 게 뭔지, 왜 그걸 욕망하는지, 그 욕망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욕망은 나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공동선에도 도움이 되는지 등등을 꼼꼼히 살펴가면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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