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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7월 15일 "원수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신다고?"(시편과 영화 6)
글번호 : 769    조회 : 116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7-18 08:08:06   
 
2018년 7월 15일 / 성령강림절 아홉 번째 주일
시편과 영화 6

원수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신다고?
시편 23:1-6

곽건용 목사

다윗의 노래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시편 23:1-6).

노벨상은 못 받았지만

오늘은 <시편과 영화> 시리즈 설교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시편 23편과 영화 <바베트의 만찬>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본래 이 시리즈는 다섯 번으로 끝낼 계획이었지만 시편 23편과 이 영화 얘기를 하려고 한 번 연장합니다. 이 영화는 10여 년 전에 누군가가 꼭 보라고 권유했는데 그 동안 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봤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자리에서 시편 23편이 떠올라서 시리즈 설교를 연장해서라도 이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의 원작은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동명소설입니다. 소설은 1백 쪽을 넘지 않는 분량의 단편인데 작가는 두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헤르만 헤세와 알베르 까뮈에 밀려서 수상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본명은 ‘카렌’인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자크’(이삭)를 필명으로 삼았답니다. 이자크는 ‘웃음’이란 뜻입니다. 그녀는 자전적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 역시 영화화됐는데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했고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으로 유명하지요. 작가는 비록 노벨문학상은 못 받았지만 영화는 1987년 칸 영화제에서 ‘Prize of Ecumenical Jury-Special Mention’상과 1988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시인은 첫 구절에서 주님을 ‘목자’에 은유합니다. 시인은 첫 마디를 은유로 시작함으로써 은유가 시 전체에 자주 등장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목자이신데 당신의 목자도 아니고 우리들의 목자도 아닌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하느님에게 1인칭 단수 소유격인 ‘나의’라는 말을 붙이는 게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와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생각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웬만큼 가깝고 친밀한 분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감히 주님에다가 ‘나의’라는 1인칭 단수 소유격을 붙이지 않습니다.

시인은 주님이 자기의 목자이므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족하다’라는 말 뒤에는 대부분 ‘~~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목적어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시인은 목적어를 생략했습니다. 문법을 모르거나 문학소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시인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목자이시니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쉬울 게 없다, 부족한 게 없다, 전적으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의미하려는 바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므로 그가 모든 걸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모든 것이니 주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지금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한 말,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선언과도 통하는 생각입니다.

‘바베트의 만찬’ 스토리

영화는 이 구절처럼 평온하고 평화로운 노르웨이의 한 시골 마을이 배경입니다. 우리가 시편 23편을 읽을 때 떠올리는 장면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시작하는 흘러간 유행가지만 사실 팔레스타인의 환경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곳은 대체로 척박한 곳이니 말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을도 춥고 우중충하고 쓸쓸하고 황량한 북유럽의 시골마을입니다.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배경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참으로 순진하고 삶은 평화롭습니다. 그들 간에도 다툼이 있고 안 보는 데서 쑥덕거리는 뒷담화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마을사람들의 삶의 중심에는 주인공 마르티네와 필리파의 부친인 청교도 목사와 그가 목회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의 딸들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마을 청년들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이 신앙 때문인지 목사의 딸들을 보기 위함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럴 때 정답은 ‘둘 다’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잘 생기고 자신감 넘치는 청년들도 그녀들 앞에서는 그저 넋을 잃을 뿐이고 용기를 내서 고백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그 자체로 남겨두는 것이 미덕인 걸까요. 마르티네를 연모하던 젊은 장교도 말없이 그녀를 떠났고 필리파에게서 최고의 디바가 될 가능성을 봤던 프랑스 출신 오페라 가수 파팽도 결국은 그녀를 떠났으니 말입니다. 두 자매는 부친의 별세 후에도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삽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원작소설에서 “슬픔과 괴로움을 안고 자매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 헛걸음하고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썼습니다. 시편이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라고 노래한 것은 두 자매의 덕을 본 마을 사람들을 두고 한 노래 같지 않습니까. 시인에게 새 힘을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고 영화에서는 두 자매가 마을사람들에게 그 일을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이 어찌 그리 평탄하고 평화롭기만 하겠습니까. 때로는 폭풍이 몰아치고 배를 뒤집을 것 같은 풍랑이 일어나기도 하는 게 인생 아닙니까. 때론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걸을 때도 있는 법 아닙니까. 어느 날 자매에게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지나온 어떤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녀는 프랑스인 오페라 가수 파팽이 보낸 바베트였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파리에서 죽임을 당한 후 갈 곳이 없었는데 파팽의 도움을 받아 그 먼 곳까지 왔습니다. 자매는 그녀를 취업시킬만한 여유가 없어 완곡하게 거절하지만 바베트는 무급으로 일하겠다고 해서 셋은 같이 지내게 됩니다. 바베트는 무급하녀로 마을에 정착해서 노인들의 기도모임까지 뒷바라지하게 됩니다. 그러자 전에는 말린 대굿국이나 검은 빵부스러기에 맥주를 섞어 끓인 스프로 형편없이 식사를 해결하던 자매는 비슷한 재료라도 훨씬 더 맛있는 식사를 하게 됩니다. 바베트가 워낙 살림을 알뜰하게 해서 먹는 입은 늘었지만 생활비는 절약하게 됐습니다. 이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바베트가 마을에 온 지 12년이 지났고 고인이 된 자매의 부친인 목사가 태어난 지 1백주년이 되는 해에 의외의 일이 벌어집니다. 그 동안 파리의 친구를 통해 꾸준히 복권을 사왔던 바베트가 1등에 당첨되어 1만 프랑을 받게 된 겁니다. 시골마을에선 구경도 못할 큰돈이었으므로 자매는 바베트가 그 돈을 받으면 프랑스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지만 바베트는 자매에게 목사 탄생 1백 주년 기념만찬을 자기가 준비해서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자매의 허락을 받은 바베트는 프랑스로 건너가서 온갖 재료들과 식기들을 사갖고 돌아옵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매우 활기차집니다. 그런데 자매는 바베트가 혹시 마녀 음식을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식사는 오직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이므로 가능한 한 최대한 간소하고 소박해야 한다고 평생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

드디어 만찬 날이 됐습니다, 식탁에 촛불이 켜집니다. 젊은 시절 마르티네를 사랑했으나 끝내 떠나갔던 장교 로렌스가 장군이 되어 돌아와 열두 명의 손님들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찬 식전주로 ‘아몽티야드’가 나왔습니다. 별 기대 없이 무심코 한 모금 마신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런 고급주가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므로 감동할 수도 없습니다. 이어 나온 와인은 1846년산 ‘클로 부조’였습니다. 여기서 장군은 기절초풍할 만큼 놀랍니다. 이런 시골마을의 만찬에 그런 와인이 나온다는 게 도무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둘러보니 이번에도 역시 시골 촌로들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장곤이 그게 최고급 와인이라고 말했지만 노인들은 그저 눈만 멀뚱거릴 뿐입니다. 뒤이어 나온 음식은 거북이 수프와 블러디 드미로프, 모두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샴페인은 파리에서도 구하기 힘든 1860년산 뵈브 클리코였습니다.

마녀 음식이 나올지 모르니 음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자는 마을사람들의 묵계는 이미 깨졌습니다. 방 안은 행복에 겨워 웅얼거리는 소리와 음식을 맛있게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리, 와인 마시는 소리, 짤그렁거리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가 죽은 후로 서로 반목하고 다퉜던 싸웠던 사람들은 바베트가 차린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합니다. 마침내, ‘카유 엉 사르코파주’(메추라기를 페스트리로 싸서 여섯 가지 이상 소스를 끼얹어 먹는 요리)가 나오자 장군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합니다. 이 요리는 파리에서도 10여 년 전 ‘카페 엥글레’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어떤 여성 셰프가 개발한 명품 요리라고 말입니다.

바베트가 바로 그 카페 엥글레의 수석 셰프였습니다. 그녀는 1870년 프로이센과의 굴욕적 강화조약에 반대해서 노동자 정부를 세우려던 프랑스 시민항쟁의 결과물인 파리코뮌에 가담했다가 남편과 아들을 잃고 이곳으로 도망쳐왔던 겁니다. 그녀는 자매에게 자기가 식사를 준비하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님들! 지난 12년 동안 제가 한 번이라도 부탁을 드린 적이 있나요? 없었습니다. 왠지 아세요? 마님들은 매일 같이 기도하시죠?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으세요? 바베트가 뭘 위해 기도하겠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오늘밤 저는 진정으로 기도할 것이 있어요. 그러니 선하신 하느님께서 마님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듯이 마님들께서 오늘밤 바베트의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바베트가 자신을 ‘기도할 것이 없던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기도할 것이 없던 사람이란 모든 걸 하느님이 알아서 들어주셔서 기도할 게 없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기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란 뜻이겠지요. 그런 그녀가, 죽음의 어둔 그림자에 거쳐서 온 바베트가 자매에게 호소합니다. 그녀를 받아준 자매가 하는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듯이 이번에는 자매가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입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가 잔칫상을 차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바베트가 만찬이 끝난 후 “그래요. 나는 카페 엥글레의 수석 요리사였어요. 오늘 음식에 내가 가진 1만 프랑을 다 썼지만 나는 가난하지 않아요. 나는 위대한 예술가니까요.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내버려달라는 외침뿐이랍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음식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감동한 로렌스 장군은 짤막한 연설을 합니다. 영화는 이를 축약했지만 소설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할 때 떨고, 선택하고 나서도 잘못된 것이 아닐까 두려워 다시 한 번 떱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은총이 무한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은총은 우리가 그것을 믿고 기다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을 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은총은 조건을 달거나 어느 누구를 특별히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은총은 우리 모두를 품에 안으며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을 얻었고, 우리가 거부한 것까지도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거부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풍요롭게 쏟아졌습니다. 자비와 진리는 하나가 되었고 정의와 축복이 입맞춤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원수들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신다는 걸까?

제게는 오랫동안 시편 23편에서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습니다. 이 시편을 읽을 때마다 거기서 멈춰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라는 5절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목자’였던 주님이 5절에서는 갑자기 잔칫집 ‘주인’(호스트)이 되셔서 시인에게 잔칫상을 차려주신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자기 머리에 기름을 발라줄 정도로 주님이 자신을 식탁의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신다는 겁니다. 또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부분은 제가 구약성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포도주 잔은 채워야 맛이라는데 주님은 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신다니 이게 웬 축복이란 말입니까.

문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라는 구절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아니, 무슨 뜻인지를 알겠는데 왜 하필 잔칫상을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차려주시는 것인가 말입니다. 기왕 잔칫상을 차려주시려면 원수를 다 물리쳐 놓고 그렇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왜 껄끄럽게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시냐는 겁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보고 부러워하라는 뜻일까요? ‘약 오르지’ 뭐 이런 뜻입니까요? 그렇다면 너무 유치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 구절의 뜻을 이해하려고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찾아봤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학자들은 4절까지는 ‘그렇지! 그런 뜻이지.’하며 무릎을 칠만한 좋은 해석들을 내놓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목자’라는 은유가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가 뭔지, 막대기는 맹수를 쫓아내는 용도로 쓰이고 지팡이는 양들을 돌보고 인도하는 데 쓰이는 물건이라는 둥, 구구절절 이해가 잘 가는 좋은 해석을 내놨습니다. 그런데 5절에 사정이 달라집니다. 주님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시인에게 잔칫상을 차려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수긍할 수 있게 해석한 학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럴 때는 과감하게 나 자신의 해석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원수들과 함께 잔칫상을 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곧 원수들도 잔칫상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부러워하기만 하는 구경꾼으로 와 있는 게 아니라 시인처럼 주님의 손님으로 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주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은 잔치에 배제되거나 구경꾼으로 온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런 저의 해석에는 텍스트 상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압니다. 그리고 이 시편이 쓰였을 때에는 이런 뜻이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특히 다양한 갈등 속에서 그런 갈등들로 인해 전쟁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온 우리는 이 시편을 ‘그때’와는 달리 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시편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를 ‘원수들과 더불어’라고 고쳐 읽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런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계셨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습니까?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수를 만들지 않는 것, 누군가를 원수로 여기지 않는 것뿐입니다. 누군가를 원수로 여기고서는 그를 용서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건 소용없습니다. 일단 누군가가 원수가 되면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올무에 옭아매려 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도 만찬을 하셨습니다.

영화에서 마을사람들 사이에 원수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로 반목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긴 하지만 그걸 ‘원수관계’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아무리 오랜 원수관계라 하더라도 그리 힘들지 않게 그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음을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목격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반세기 이상 남과 북은 한 겨레면서도 얼마나 으르렁거리고 다퉈왔습니까. 서로 원수로 여기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적대관계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개선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남과 북의 정상과 관계자들이 만찬을 같이 하는 광경을 보고 ‘내 잔이 넘칩니다!’라는 시편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또 어떤가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이 이루어지리라고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원수들 앞에서’를 ‘원수들과 더불어’로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여전히 시편 23편의 시인이 왜 주님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에게 잔칫상을 차려주셨다고 노래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약 오르지?’ 하는 심정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시편을 새롭게 읽어도 됩니다. 아니,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원수들 앞에서’를 ‘원수들과 더불어’로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불러 예수의 제자로 만들어주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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