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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8월 5일 "굽실대지 말고 당당히 믿자"
글번호 : 772    조회 : 28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8-29 21:42:02   
 
2018년 8월 5일 / 성령강림절 열두 번째 주일

굽실대지 말고 당당히 믿자
예레미야 44:15-19 학개 1:3-11 마태 5:43-48

곽건용 목사

15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친다는 것을 아는 모든 남편들과 그 곳에 서 있던 모든 여인들, 곧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에 사는 온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항의하였다. 16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17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오. 우리와 우리 조상과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우리도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소.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 19 여인들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칠 때에 우리가 남편들도 모르게 그것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신의 모습대로 빵을 만들어 바치며 술 제물을 바칠 때에 우리가 남편들도 모르게 그것을 했겠습니까?”(예레미야 44:15-19)

3 학개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4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5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6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7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 성전을 기껍게 여기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가 말한다. 9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10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소출을 그쳤다. 11 내가 땅 위에 가뭄을 들게 하였다. 산 위에도,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 위에도, 밭에서 나는 모든 것 위에도, 사람과 짐승 위에도, 너희가 애써서 기르는 온갖 것 위에도 가뭄이 들게 하였다(학개 1:3-11).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3-48)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는 한계를 인식하고 해야

오늘은 구약과 신약에서 상당히 긴 세 구절을 읽었습니다. 저는 제가 설교에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여러분이 모르게 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도 애매모호하고 알쏭달쏭하게 붙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걸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늘 성경말씀을 꼭 미리 읽어 오시라고 문자까지 보냈습니다. 그걸 집중해서 읽었다면, 그리고 오늘 설교제목을 보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내용의 찬양을 불렀지만 이 찬양은 적어도 성서와는 맞지 않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사람을 만들어놓고 “참 좋구나!”라며 스스로 감탄했던 하느님은 넉 장 넘어가서 6장 와서는 사람 만든 걸 후회했다고 했습니다. 넉 장 앞에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고 감탄하며 만족하셨던 하느님이 창세기 6장에 와서는 사람을 만드신 걸 후회하셨다는데 어떻게 하느님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노아 시대에 일어난 대홍수는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벌어진 대규모 참변으로서 애꿎은 여타 뭍짐승들까지 몰살당한 참변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대체로 부질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주장하지만 그 말과 주장은 단지 ‘우리의’ 생각과 말과 주장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정된 사고의 틀 안에서 하는 생각과 주장일 따름이란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그런 인간의 생각 틀 안에 담기는 분이라면 그게 무슨 하느님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좁디좁은 생각을 갖고서 그게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며 다투고 있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하느님에 대해 생각과 말과 주장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되, 그 주장의 한계는 분명히 인식하면서 하자는 뜻입니다.

성체 훼손 사건

얼마 전에 한국의 한 페미니즘 단체가 가톨릭의 성체를 훼손하고 모독했다고 해서 물의가 빚어졌습니다. 그들은 매주 하나씩 성당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행위를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과 모욕으로 판단하여 성명서도 내고 교황청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성체는 성만찬 때 사용하는 밀떡으로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만찬은 개신교에서 그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릅니다. 개신교는 성만찬의 떡이 예수님 몸을 ‘상징’한다고 보는데 가톨릭에서는 떡을 사람이 취하는 순간 그것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밀떡을 개신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고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남녀차별이 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 프란시스코 교황 이후로는 많이 개선됐지만 불평등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 남녀차별이 심하다고 해서 여성운동 단체가 꼭 그런 식으로 성체를 훼손했어야 하는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런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 봤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성운동 단체의 행위보다는 거기에 대한 가톨릭교회가 반응이 제게는 더 아쉬웠고 더 큰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는 엄청난 격변기에 들어섰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횡행하던 불의와 부정의 속살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고 그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정부기관을 비롯해서 사회 각 분야에 변화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데 종교계도 거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번 사건이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는 가톨릭의 성차별에 대한 극단적인 항의와 저항행위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방법은 옳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이젠 가톨릭교회는 그 동안 저질러온 성차별을 중단하고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사실 가톨릭교회가 오랜 세월동안 다른 종교의 거룩한 상징들을 얼마나 많이 훼손했습니까. 가톨릭과 개신교는 유대교를 ‘구세주를 죽인 자들의 종교’라고 해서 얼마나 박해했습니까. 이슬람은 또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종교적 가치와 상징들을 그리스도교는 존중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물들을 도둑질했고 파괴했습니까. 그런 처지에 이번에 이른바 성체 훼손에 대해 그렇게 발끈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가톨릭교회가 이번에 성체를 훼손한 사람들에게 점잖게 유감을 표시하면서 그 동안 자기들이 저질렀던 무자비한 짓들을 참회하고 사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싶습니다.

종교의 효용성?

오늘은 종교의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해 얘기하려 했는데 성체 훼손에 대한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둘이 무관하지는 않으므로 시간 낭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종교의 물질성이라고 하니 뭐 대단히 어려운 얘기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는 왜 종교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종교로 뭘 하려 하는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 44장, 학개 1장,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을 읽었는데 이 구절들은 시간적으로도 이 순서로 쓰였습니다.

예레미야 44장은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이집트로 피신한 유다 사람들과 예언자 예레미야 사이의 논쟁을 전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오. 우리와 우리 조상과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우리도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소.

잘 읽어보면 이들도 예레미야가 야훼 하느님의 예언자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따르지 않겠답니다. 그리고는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술 제물도 바치겠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야훼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제물 바치는 행위는 이스라엘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무거운 죄입니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을 어기는 행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걸 하겠답니다! 그뿐입니까, 이들에 따르면 자기들 조상들과 왕들과 고관들도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모두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면 구약성서를 뒤져봐야겠지만 오늘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그들이 ‘왜’ 그랬냐는 겁니다. 그들은 왜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바쳤느냐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한 말이 답이 있습니다.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답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정말 이들의 주장대로 야훼가 아니라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바쳤을 때 양식도 풍부했고 재앙도 만나지 않고 잘 살았을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좌우간 그들은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다음으로 학개 1장을 봅시다. 예언자 학개는 야훼 하느님의 성전이 무너져 있는데 백성들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성전이 없으니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는 것처럼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얼른 성전을 건축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만사형통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유다 사람들의 주장과 학개 예언자의 주장이 어디가 얼마나 다릅니까? ‘하늘 여신’에게 제사를 바쳐서 풍요롭게 누리고 살았다는 주장과 야훼 하느님에게 성전을 지어 바치지 않아서 못산다는 주장이 뭐가 다릅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둘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집트의 유다 사람들에게는 하늘 여신이지만 학개 예언자에게는 야훼 하느님이었다는 점뿐입니다. 양쪽 모두 자기들이 믿는 신의 기분을 좋게 해서 원하는 바를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리’로서의 신앙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장입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예수님도 ‘실수’하셨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구약성서 이외에 유대인들에게 그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약성서에는 없습니다. 좌우간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과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겠다는 주고받기 식의 ‘실용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혼비백산할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들 생각에는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런 ‘효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사람들, 그가 얻으려는 것이 물질이든 영적인 가치든 뭐든 간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뭔가를 얻기를 바라는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대체 뭡니까? 무엇 하러 신앙을 갖습니까? 저는 어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쓴 글을 하나 읽었는데 거기서 신앙이 뭔지, 뭣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북한에 대대적인 퍼주기를 시작할 시점이다’입니다. 그 글의 전체적인 내용을 소개할 시간은 없고, 네가 신앙에 대해 영감을 얻은 부분만 소개합니다.

정 장관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해 2월에 노 대통령이 취임하셨고 이어 4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장관급회담을 앞두고 회담 전략과 목표, 회담 운용 방안 등에 대해 대통령께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보고를 마치고 나자 노 대통령이 “협상의 명수시니 잘 하시겠죠”라고 말하더니 대뜸 “우리가 북을 돕는 건 인도주의도 아니고 동포애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겁니다. 그 얘기 들으면서 정 장관은 대통령이 변호사 출신답게 법리적인 말을 하려나 생각하면서 “인도주의도 아니고 동포애도 아니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노 대통령은 “우리가 북을 돕는 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북한을 돕는 것은 인도주의도 동포애도 아닌 ‘도리’라는 말이 제 뇌리에 박혔습니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신자인 우리들에게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도 아니고 벼락이 우리만 비껴가기 때문도 아닙니다. 곧 무슨 보상을 얻기 위해서나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게 업적이 되어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보장받아서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예수의 제자로 살려 하는 것은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도리’입니다.

‘도리’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본분입니다.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신앙도 그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진화’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이 많지만 사실 신앙도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앞에서 인용한 예레미야와 학개 시대의 신앙은 그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복을 누리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 절대자 신이 명령한다고 믿었던 것들을 행했습니다. 제물을 바쳐야 신이 좋아한다고 믿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면서 신앙도 진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진화의 흐름에서 일종의 ‘도약’을 이룩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쓸모’나 ‘효용’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시대를 지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선악과 무관하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공짜로,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쓸모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고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도 아니란 겁니다. 그럼 신앙은 뭔가요? 그것은 ‘도리’입니다.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마땅한 ‘도리’ 말입니다.

인류의 종교는 여기까지 진화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주고받기 식의 실용주의 신앙에 머물러서 되겠습니까. 이젠 앞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세상을 앞서 가지는 못할지언정 세상에 뒤쳐져서야 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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