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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9월 2일 "심지 않고 거두고 뿌리지 않고 모으는 하느님 2"
글번호 : 775    조회 : 80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9-04 17:51:40   
 
2018년 9월 2일 / 성령강림절 열여섯 번째 주일

심지 않고 거두고 뿌리지 않고 모으는 하느님? 2
마태 25:24-30 누가 19:20-27

곽건용 목사

24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25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27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 25:24-30)

20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은 야무진 분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므로 나는 주인님을 무서워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 22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 너는 내가 야무진 사람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 알고 있었지?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화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24 그리고 그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5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 그는 열 므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누가 19:20-27).

의외의 뜨거운 관심

저는 매주 주일예배 공동기도와 설교문, 그리고 설교 동영상을 매주 제 페이스북에 올립니다. 동영상은 두 교우의 협조로 촬영되고 편집됩니다. 두 분께 감사합니다. 지난주에도 늘 하던 것처럼 설교문을 올렸는데 페이스북 친구들에게서 의외로 뜨거운 반응이 있었습니다. ‘다음 설교가 기대된다.’느니 ‘한 주일을 어떻게 기다리냐, 미리 올려줄 수 없느냐.’는 등 뜨겁게 반응하더군요. 평소에는 워낙 긴 글이라서 그런지 별 호응이 없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서른한 명이 설교문을 공유하기도 했고요. 저는 의외의 뜨거운 반응에 어안이 벙벙하긴 했지만 우리 교우들을 포함해서 온라인에서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오늘 설교를 기다리고 있어서 부담을 좀 느꼈습니다. 하지만 준비한 대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비유 중에서 세 번째 종과 관련된 부분만 읽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비유의 핵심은 세 번째 종과 주인의 대화 및 세 번째 종이 한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비유 해석의 세 가지 열쇠를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비유가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이고, 둘째는 주인은 누구인지이며, 셋째는 왜 세 번째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뒀는지를 이해하는 게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물음, 곧 비유가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자세히 얘기했듯이 ‘친일파’ 하면 이완용, ‘바보’ 하면 노무현이 떠오르듯이 예수시대에 ‘왕위를 얻으러 먼 길을 여행한 사람’ 하면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아르켈라오스를 떠올리는 게 자연스런 일이었으니 누가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귀족’은 다름 아닌 그 사람, 헤롯 아르켈라오스를 가리킨다고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누가와 마태 중에서 누가 전한 비유가 본래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가까운가 하는 물음입니다. 만일 누가의 것이 더 가깝다면 왜 마태는 그의 정체를 모호하게 처리했을까요? 반대로 마태가 더 본래에 가깝다면 왜 누가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헤롯 아르켈라오스를 떠올리게끔 ‘왕위를 받으러 먼 길을 떠난 귀족’이라고 구체화했을까요? 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데 저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곧 마태가 본래는 구체적으로 정체가 밝혀져 있던 주인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확고한 근거를 갖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대체로 사람들은 모호한 것을 구체적으로 바꾸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청중들이 누군지 곧 알 수 있는 사람을 예로 들었는데 마태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가능한 한 정치색을 빼기 원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정말 ‘하느님’을 가리킬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마태가 본래적인지 누가가 본래적인지가 아니라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키는지 여부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킬까요?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서 ‘주인’이나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런 것과 ‘전부’ 그런 것은 같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렇다고 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인’이 등장하면 바로 그를 ‘하느님’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설령 이 비유 이외에 ‘모든’ 비유에서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킨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맥락과 문맥을 따져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럴듯한 것’과 ‘반드시 그런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와 ‘반드시 그렇다’도 혼돈하면 안 됩니다. 수사에 있어서 ‘정황증거’와 ‘물증’은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언젠가 얘기했듯이 저는 고 노회찬 의원이 작고한 후 한 주간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를 한 편 봤습니다. 노 의원 작고와 드라마 시청을 별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좌우간 그랬습니다. 거기 등장하는 한세상 부장판사는 정황증거만 갖고 어떤 사람을 세 명을 죽인 살인자라고 판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한 사람만 죽였고 두 사람을 죽인 진범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직서’를 써서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늘 놔둔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과 정황증거만 갖고 그를 두 사람을 더 죽인 살인자로 판결한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재판정 안에서만큼은 판사가 최고 권력자이므로 판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명언도 남겼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정황증거는 물증이 아닙니다. 설령 다른 모든 비유에서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킨다 해도 이 비유에서도 그렇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맥락과 문맥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따져본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이 점을 강조하는가 하면 이 점이 비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유에서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가능한 한 공정을 기하기 위해 만일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킨다면 그렇게 볼 근거가 뭔지를 따져보겠습니다. 우선 종들에게 돈을 주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비유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동을 주인이 하는데 거기서는 주인이 하느님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반드시 하느님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시대에 부자들은 이런 식의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또한 지금과는 달리 보통사람은 먼 거리 여행을 할 일도 없었고 그럴 경제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부자들이나 재산을 관리하거나 관리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먼 거리 여행을 했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비유의 귀족처럼 왕위를 얻으려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서 정산을 했다는 데서 그를 하느님으로 볼 근거를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많은 경우에 ‘정산’은 곧 ‘심판’이고 심판은 하느님만 하시는 일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정산이 곧 ‘최후의 심판’이라고 봐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아니어도 종들에게 돈을 맡긴 주인이 마땅히 정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종들에 대해서 전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걸로 봐서 그를 하느님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노예주인은 종들에 대해서 하느님에 버금가는 전권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웬만한 노예주는 ‘주님’(Lord, 그리스어로 ‘Kyrios’)으로 불렸습니다. 굳이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주인은 대개는 종들에게 이렇게 전권을 행사했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이것만 갖고 주인을 하느님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을 ‘하느님’으로 보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누구인가?

다음으로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라’고 볼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의 비유를 보면 청중들은 비유의 ‘귀족 출신의 주인’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헤롯 아르켈라오스를 떠올렸을 터이므로 거기서 그를 ‘하느님’으로 볼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설마 예수님이 하느님을 가리키는데 로마 황제에게 뇌물을 줘가면서 왕위를 든든히 하려 했던 사람을 들었겠습니까. 폭동​을 진압​하다가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서 3천 명이나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람을 말입니다. 대제사장​을 맘대로 두 번이나 갈아치운 잔인한 통치자를 하느님에게 견주었겠냐 말입니다. 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가 전한 비유 얘기이고 마태에는 이런 추측을 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마태에도 주인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을 근거가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세 번째 종이 주인을 가리켜 한 말이 그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가리켜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이 말은 속되게 말하면 ‘날로 먹는 사람’이고 ‘착취자’라는 뜻입니다. 거두려면 심어야 하고 모으려면 뿌려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이 사람은 심지도 않고 거두고 뿌리지도 않고 모은다고 하니 남이 심고 남이 뿌린 것을 손도 안 대고 거두고 모은다는 뜻 아닙니까. 이게 ‘착취자’가 뭐겠습니까.

문제는 세 번째 종의 이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는 거짓말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세 번째 종이 자기 행위에 책임지지 않으려고 주인에게 뒤집어씌운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책임을 피하려고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달리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의 말을 듣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만으로는 주인이 종의 주장에 동의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애매해 보이지만 명백한 사실은 이 문장이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이란 점입니다. 주인은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느냐?”라고 말하지 않고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어성서(NRSV)도 “You knew that I reap where I did not sow and gather where I did not scatter.”라고 번역했고 희랍어 원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종의 얘기를 인정했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백 보 양보해서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오랜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유를 선입견 없이 처음 듣는 사람은, 곧 주인은 곧 하느님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주인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텍스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해석을 여전히 뜨악하게 여기는 것은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입니다. 하긴 쉽게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선입견이고 편견이겠냐마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이자놀이를 하라고 했다고?

주인을 하느님으로 볼 수 없는 두 번째 근거가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도 선입견에 머무른다면 저도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종의 주장에 동의한 바로 다음에 그가 한 말입니다.

“그렇다면(나를 그런 사람으로 봤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이 말이 결정적입니다! 결정적으로 비유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신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자놀이 하는 걸 엄격하게 금하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구약성서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마치 잊어버릴까봐 염려하듯이 말입니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출애굽기 22:25)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희가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25:35-38)

“당신들은 동족에게 꾸어 주었거든 이자는 받지 마십시오. 돈이든지 곡식이든지 이자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23:19)

현대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는 게 당연하니 말입니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이자를 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안 받는다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주인이 세 번째 종에게 한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했다는 말에 아무 문제도 못 느낍니다. 예수시대에도 지금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게 당연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방금 인용한 구약성서 구절들에서 보듯이 야훼 하느님은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자놀이를 금했습니다. 물론 예수시대에 편법적으로 이자놀이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이방인에게 돈을 주고 그로 하여금 이자를 받게 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든 편법을 써야 했다는 사실은 이 계명이 얼마나 엄격하게 준수됐는지를 반증하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비유에서 주인은 이자놀이를 하지 않았다고 종을 꾸중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자가 어떻게 하느님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자를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썼겠느냐 말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비유를 듣던 청중 중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겁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는 예수님에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청중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저는 비유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주인’은 하느님일 수 없습니다. 그럼 그는 누굴까요? 그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신분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시에 살면서 농촌에 큰 땅을 갖고 있으며 모종의 사업을 하는 부자 엘리트 귀족이었습니다. 당시 사회경제체제에 따르면 그는 중간관리인을 두고 그들에게 일정한 자율권을 주어서 자기 재산을 불린 부자 엘리트 귀족이었던 겁니다.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전통적 해석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주인은 곧 하느님이라는 등식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되고 또 그렇게 전제하기 때문에 비유의 의미는 다른 것을 따져보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은 곧 하느님이므로 그가 한 말과 행동을 어떻게든지 이해해보려 하고 억지로라도 좋게 해석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전제를 포기하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의 언행을 좋게 해석할 이유가 없고 정당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전제를 버려야 할 근거가 있느냐는 것인데 저는 지금까지 긴 시간을 써가면서 다양한 근거를 들어 그 전제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얘기가 그럴듯했습니까? 설득력이 있었습니까?

여기까지 설득됐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해결하면 됩니다. 그것은 왜 세 번째 종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는 왜 돈을 땅에 묻었을까요? 왜 그 돈으로 남들처럼 장사를 하지도 않았고 주인의 말처럼 돈놀이를 하지도 않았을까요? 왜 그는 주인의 돈을 불려주고 자기도 떡고물을 취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주인은 자기 돈을 곱절 정도로 늘려줄 걸 기대했다고 합니다. 앞의 두 종이 한 것처럼 말입니다. 종들은 이득을 어떻게 얼마나 얻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알려진 바로는 주인은 자기 돈을 불려준 대가로 종들에게 수당이나 급료를 따로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종들은 주인의 돈을 100% 이상으로 불린 다음에 주인에게는 100%만 주고 나머지를 자기가 취했다는 겁니다. 주인은 한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종들의 ‘횡령’을 눈감아줬습니다. 종들은 이 ‘선’을 잘 지켜야 했습니다. 자기 몫으로 지나치게 많이 취하면 민초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고 너무 적게 취하면 자기가 손해를 보게 되니 적당한 선을 지켜야 했던 겁니다. 그 복잡한 과정과 절차를 우리가 다 알 필요는 없겠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목은 이런 사정 때문에 돈을 땅이 묻은 종은 주인의 이득만 망친 게 아니라 자기 몫도 포기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그는 왜 자기 몫을 포기해가면서 돈을 땅에 묻었는가 말입니다.

경험 부족을 이유로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장사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돈을 벌 자신이 없어서 그걸 땅에 묻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한 달란트라는 돈은 장사경험이 부족한 종에게 맡기거나 누군가를 테스트할 목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도 큰돈이기 때문입니다. 계산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서 6천 명의 하루 일당이고 한 사람의 15년 치 일당에 해당됩니다. 액수가 과장됐다 하더라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허드렛일이나 하는 단순노예가 아니라 다른 두 사람처럼 주인에게 상당한 지위와 권력을 부여받은 ‘중간관리자’로 봐야 합니다. 그 역시 다른 두 사람처럼 과거에 주인을 돈을 잘 불려줬기에 상당히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가 전에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잘 해왔지만 이번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있긴 합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일을 잘 했지만 가끔 게을러지는 때가 있게 마련인데 이때 그랬을 거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가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면 주인더러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이라고 대들었겠습니까. 주인을 가리켜 대놓고 ‘착취자’라고 불렀겠는가 말입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윌리엄 허조그 2세는 이 사람이 ‘내부고발자’(whistle-blower)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주인의 정체를 드러낸 사람이란 겁니다.

그는 왜 달란트를 땅에 묻었을까?

경험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특정 의도를 갖고 돈을 땅에 묻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도가 뭘까요? 그는 무슨 생각으로 돈을 땅에 묻었는가 말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본문이 말하지 않으므로 해석자는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사람이 돈을 땅이 묻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상상합니다.

그가 하루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들판에 나갔습니다. 들판에는 소작농부들과 일용노동자들이 이곳저곳에서 그때까지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 봐야 소작료로 70% 이상을 주인에게 빼앗깁니다. 일용노동자들은 이른 아침 해 뜰 때부터 그때까지 일해 봐야 가족들 입에 풀칠을 하기도 버겁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이미 주인에게 진 빚은 고율의 이자에 이자가 붙어 감당할 수 없는 액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는 기를 쓰며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일했고 주인의 재산을 불려줬습니다. 힘겹게 일하는 소작농부와 일용노동자들을 보며 그는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한 걸까?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아왔던가? 나는 뭘 해서 주인의 재산을 불려줬고 무슨 짓을 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가? 저들은 내가 하는 짓 때문에 등골이 휘어지도록 일을 해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게 정말 사람이 할 짓인가. 이게 진정 사람 사는 길인가. 그는 그 동안의 자기 삶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고 참회합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더 이상 저 사람들을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 삶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저들에게 나눠줘 본들 주인은 자기를 내쫓고 나눠준 돈을 거둬들이면 그만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휘슬을 불기로 결심합니다. 주인 면전에서 주인의 정체를 드러내기로 작심합니다. 주인 앞에서 “당신은 심지도 않고 거두고 뿌리지도 않고 모으는 착취자요!”라고 외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만 그는 최초로 휘슬을 부는 내부고발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도 알았을 겁니다. 자기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말입니다.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겠지요. 그 동안 주인을 대신해서 했던 자신의 행위로 인해 하루하루 죽어가는 사람들 속으로 자신도 추락할 걸 그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 결과를 달게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합니다. 주인의 말은 틀리지 않아서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걸로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거기서 자기처럼 휘슬을 불 사람들을 모으지 않았겠습니까. “당신은 심지도 않고 거두고 뿌리지도 않고 모으는 착취자요!”라고 외칠 사람들을 모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다가 살아난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가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호루라기를 부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비유에 등장하는 세 번째 종처럼 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는 우리네 삶이 현 자본주의 체제에 꽉 묶여 있습니다. 그 완고한 올무를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기에 세 번째 종처럼 모든 걸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이 억압적인 체제에서 해방되고 싶지만 몸은 이미 이 체제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몸이 머리를 거부합니다. 생각과 몸이 따로 노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겁니다. 둘을 일치시키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맙시다. 몸이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외치십시오. “당신은 착취자요!” “이 체제를 정의롭지 않소!”라고 말입니다. 비록 몸은 따라가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외치십시오. 따라가지 않는 몸에 여러분의 생각을 일치시키려 하지 맙시다. 생각을 일관되게 하면 몸은 언젠가 바뀌지만 그걸 포기하면 생각도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비유로써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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