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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10월 7일 "주께서 저를 속이시다니요!" (예레미야 3)
글번호 : 778    조회 : 12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12-01 15:39:54   
 
2018년 10월 7일 / 성령강림절 스물한 번째 주일 / 세계성찬주일
예레미야 3

주께서 저를 속이시다니요!
예레미야 20:7-12

곽건용 목사

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10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11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12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예레미야 20:7-12).

예언서를 읽을 때 염두에 둘 점

모든 예언서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를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책들은 그것이 전하는 사건이 벌어진 지 제법 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러니까 사건의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쓰인 책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국인 유다가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서 멸망당했음을 다 아는 상태에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때의 상황을 서술했던 겁니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사건이 다 지난 다음 돌이켜보면 그게 그렇게 흘러갔을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래서 필연적이거나 심지어 그게 ‘역사의 법칙’이었다고 말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때 거기서 사건을 겪었던 사람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있던 여러 가지 선택들 가운데 하나를 택했던 것입니다. 사건의 결말이 그렇게 된 것은 필연도 아니었고 역사의 법칙도 아니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 사람들은 ‘앞으로 우리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는 게 필연이니까 이렇게 선택하자.’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바빌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그들에게는 세 가지 정도의 옵션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독자적으로 싸우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집트의 힘을 등이 업고 주변나라들과 연합해서 바빌론과 싸우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바빌론에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유다는 두 번째 옵션을 시도하다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궤멸되고 말았고 세 번째 옵션을 주장한 예레미야는 왕과 지배층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고 투옥되어 죽을 뻔한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가 바빌론에 의해 풀려났지만 반대파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서가 정확하게 언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유다가 바빌론의 식민지가 된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쓰였다는 것이 대략의 합의입니다.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멸망의 사건에서 받은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한 후 자기들의 과거를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됐을 때 예레미야가 했던 예언의 메시지와 그에 대한 자기들의 응답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그 일을 겪은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역사를 쓸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저는 ‘그게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살아 있는 당대에도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역사를 어느 정도라도 객관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기록하려는 사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과거 사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걸까요?

얼마 전에 남북한 당국은 한국전쟁 당시 비무장지대에 묻었던 지뢰를 공동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지금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화해 분위기로 흘러가면서 가능하게 된 일로 보입니다.









한국전쟁은 끝났습니까? 정말 전쟁은 끝났을까요? 전쟁 당사자들 간에 아직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이 맺어지지 않았으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정치적인 조치인데 그것 말고도 전쟁을 끝내려면 해야 할 일들이 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뢰 문제도 그 중 하나입니다. 휴전선 인근에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수많은 지뢰가 묻혀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의 철조망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왕래하게 됐다고 해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고 김남주 시인이 말한 대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슴에도 있고 아직 묻혀 있는 지뢰 하나하나에도 있는 게 아닙니까.

2차 대전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저는 얼마 전에 충격적인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이란 영화입니다. ‘지뢰밭’이란 뜻이죠. 영화는 2차 대전이 끝난 후(2차 대전이 ‘벌어지는 중’이 아니라 2차 대전이 ‘끝난 후’입니다!) 덴마크군의 포로가 된 독일의 소년병 열세 명이 덴마크군 상사 한 명의 지휘 하에 지뢰를 제거하는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지뢰는 연합군이 상륙할지도 모를 덴마크 서부해안에 독일군이 것들로서 수만 개에 달합니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포로들은 그들 나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덴마크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껏 15-6세 정도 되는 소년병들을 지뢰를 제거하는 위험한 일에 동원했습니다. 독일군이 묻어놓은 지뢰이니 독일군이 제거하라는 겁니다. 시간관계상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는데 저는 이 영화를 차마 볼 수 없어서 보기를 중단했다가 다시 보기를 서너 번 반복했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자막으로 덴마크군은 약 2천 명의 포로들을 동원해서 150만 개의 지뢰를 제거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가 지뢰 제거의 피해자인 독일이 만든 영화가 아니라 가해자 덴마크가 만든 영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 자기들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 영화인 셈입니다. 2차 대전 중에 자기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여전히 부인하고 배상하지 않으려 하는 일본의 작태와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인류 최초로...

우리 휴전선에서의 지뢰제거와 그와 비슷한 영화 얘기를 길게 한 까닭은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독특한 점이 이런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예언서는 당시 거대 문화권이었던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문화권과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점들이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로 구약성서 예언자들은 인류 최초로 정치권력을 의지하지 말라고 외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익숙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종교가 권력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당연시되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근대사상의 산물입니다. 유럽에서 고대는 말할 것도 없이 중세 때까지도 종교가 권력을 소유하거나 그걸 이용하거나 그것과 한 배를 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었던 겁니다. 구약성서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랬습니다. 신과 정치권력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신과 동일시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에게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을 의지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권력과 하느님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대내적으로도 그렇고 대외적으로도 강대국의 권력에 의지하지 말라고 외쳤는데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상황에서 이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지만 - 물론 아직도 권력과 결탁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 문제 삼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거짓말을 남발하는 권력 지향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말입니다 – 구약성서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었습니다. 권력과 하느님이 둘이 아닌 하나로 여겨졌으므로 권력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곧 하느님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두 번째로 예언서, 특히 바빌론 제국에 의한 위기 시대에 활동했던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은 야훼 하느님은 자신의 거처인 성전을 스스로 파괴하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신이란 점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따라야 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기대했고 신뢰했던 당신의 백성들이 역한 냄새를 피우며 제물의 기름만 태워 바칠 뿐, 기대했던 정의와 자비와 긍휼을 실천하지 않았을 대, 백성들이 그토록 신뢰하고 신줏단지처럼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얹혀 있지 않게끔 파괴해버렸습니다.

그 당시 어떤 문화권에서도 그 어떤 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머물던 자기의 집(성전)을 스스로 파괴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의 침입을 받아서 그들이 믿는 신의 집이 타의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신전을 파괴당한 신을 믿던 종족은 그걸 파괴한 종족의 신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패배한 신을 믿고 따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처럼 믿는 신을 바꾸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정복당한 종족은 당연히 그렇게 했습니다.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간다는 식의 ‘지조’나 ‘의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또한 그 어떤 신도 자기의 의지로 자기가 거주하던 신전을 파괴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야훼 하느님은 백성들의 불신 때문에 스스로 거주하던 성전을 바빌론 군대에 내주고 파괴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예언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해온 얘기입니다. 저는 여기에 제가 이번이 설교를 위해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깨달은 점 하나를 보태려 합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서가 기록됐을 때까지 바빌론과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번에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이런 사실을 읽었습니다. 유다와 바빌론의 전쟁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후에 몇 차례 유다 편에서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전쟁의 상흔(傷痕)은 전투가 끝난 후에도 매우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백성들의 삶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예레미야서가 기록됐을 때까지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서 곳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로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 같이 지배층을 대상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전쟁을 할지 말지, 타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할지 말지, 또한 바빌론에 항복할지 말지 등을 결정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피상적으로만 읽으면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곧 실제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할 민초들은 하느님과 예언자의 안중에도 없나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민초들이 하느님의 안중에 없기는커녕 그들은 하느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파멸에 놓였을 때 하느님과 예언자가 가장 안타까워하고 아파하셨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럴 어떻게 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텍스트를 잘 읽어보면 이 사실이 드러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예레미야서는 유다가 바빌론에 패망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쓰였지만 이 책은 그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때까지 제거되지 않은 지뢰가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언자는(예레미야서에서 이 둘은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느님과 예언자’라고 둘을 병렬로 표기합니다) 과거를 회고하면서 슬피 우는 게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애곡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당하고 한참을 지나서도 아직도 여기저기에 지뢰가 묻혀 있었던 것이고 하느님과 예언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아프고 또 아팠습니다. 백성들의 가슴 속에, 그들의 삶 속에는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고 있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이고 우리는 제일회중교회 교우들과 함께 성찬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1시 45분까지는 그들이 예배하는 장소로 옮겨야 해서 오늘 설교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만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레미야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소연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본문을 읽을 수는 없지만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이 자기를 속였다고 하소연합니다. 자기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지켜주기는커녕 온갖 모멸과 수치를 겪게 했다고도 했습니다. 자기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백성들은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기 때문에 자기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지요. 다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자기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기 때문에 그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일들이 자기 안에서 일어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런 일들은 자기뿐 아니라 하느님의 심장 속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예언자인 그는 그걸 경험했습니다! 그가 유다 백성들이 하는 꼴을 보면서 애간장을 태운 것은 단순히 그들의 행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하느님이 애간장을 태우시는 걸 그가 봤고 느꼈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가 겪는 고통은 곧 하느님이 겪는 고통의 반영이었던 겁니다. 그는 민초의 가슴이 찢어지는 데서 하느님의 고통을 봤고 그랬기 때문에 자기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던 겁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심장을 들여다 본 사람이었던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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