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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11월 11일 "심장에 새겨진 약속" (예레미야 5)
글번호 : 780    조회 : 17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12-01 15:42:16   
 
2018년 11월 11일 / 성령강림절 스물여섯 번째 주일
예레미야 5

심장에 새겨진 새 언약
예레미야 31:31-34

곽건용 목사

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31:31-34)

뽑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로 하라

오늘로 예레미야서를 갖고 하는 설교는 일단 마무리합니다. 처음부터 ‘수박 겉핥기’가 될 걸로 봤지만 실제로는 수박의 겉을 제대로 핥아보지도 못하고 끝납니다. 중간에 제가 고국 방문차 두 주간 강단을 비웠고 지난 주일에는 고국방문에서 느낀 점들을 얘기하느라고 그렇게 됐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또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여타 예언서들과 달리 예언자의 내면세계에 대한 얘기가 많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내면세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속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언자가 단순히 하느님에게서 메시지를 받아서 그걸 기계적으로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장 속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하느님의 정열(passion)을 함께 느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런 경험을 하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하느님의 속마음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가 분노한 것은 하느님이 분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곧 하느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와 하느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기 때문에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의 말인 것처럼 선언할 수 있었고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심판과 재건, 멸망과 구원의 약속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뽑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며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라’는 겁니다. 분량만 놓고 보면 뽑고 부수라는 메시지가 세우고 심는 메시지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둘 아시에는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그가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한 시기에 주로 활동했으니 재건과 구원보다는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해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우고 심으라’는 재건과 구원의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지만 그것은 예레미야서를 잘못 읽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미친 짓을 하다

때는 바야흐로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략하던 때였습니다. 그 시기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예레미야애가에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끔찍한 말이 잘 보여줍니다.

굶어 죽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칼에 죽은 사람이 낫겠다. 다쳐서 죽은 사람이 먹거리가 없어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낫겠다. 내 백성의 도성이 망할 때에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제 손으로 자식들을 삶아서 먹었다(애가 4:9-10).

인류 역사에 참혹하지 않은 전쟁이 있겠냐마는 양식이 떨어져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는 그 참혹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함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 상황을 ‘죽음이 거리를 활보하고 창가에까지 다가왔다’고는 말로 표현했습니다(9:21).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놀라운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남들은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고향 아나돗에 있는 사촌 소유의 땅을 사들인 겁니다. 구금되어 자유롭지 않았던 그는 사람을 시켜서 사촌의 땅을 사들이고 법적절차까지 마무리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이 행위가 훗날 백성들이 ‘그 땅에서 집과 들과 포도밭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징표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군데군데 들어있습니다. 유일한 예외로 그 메시지가 한 군데 모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30장에서 33장까지 넉 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대목을 ‘위로의 책’(the book of conso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 중 몇 절인데 기왕 읽는 김에 두 군데만 더 읽어보겠습니다.

“나 주의 말이다. 때가 오면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에 나 주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겠으니 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너는 다시 너의 소구를 들고 흥에 겨워 춤을 추며 나오게 될 것이다. 내가 너로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원을 만들 수 있게 하겠다. 포도를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따 먹게 하겠다. 에브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어서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의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자!' 하고 외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31:1-6).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한다. 내가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할 때에 사람들은 유다 땅과 유다의 성읍에서 이런 말을 다시 하게 될 것이다. '너 정의의 보금자리, 거룩한 산이여, 주님의 복을 받아라.' 그 때에는 유다와 그 모든 성읍에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고 농부들도 농촌에 모여 살고 유랑하는 목자들도 가축 떼를 몰고 다닐 것이다. 나는 지친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고 굶주려서 허약해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겠다. 그 때에 백성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 보니 나에게 아주 단잠이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전에 그들을 뽑아내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재앙에 빠뜨리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31:23-28).

새 언약을 맺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독교인들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새 언약’이라는 말에서 ‘신약’(new testament)이란 말이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새로운 언약’의 줄임말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라고 언급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신약이 구약보다 높은 지위를 갖는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이란 단어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 담겨 있는 뜻이 중요하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왜 새 언약인가가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31절에서 하느님은 그 때가 오면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울 터인데 그것은 하느님이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르다고 말씀했습니다. 새 언약을 세우는 까닭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무효화된 것은 아닙니다. ‘언약’ 이전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언약이 깨졌다고 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무효화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것을 이루고 성취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맺을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새롭다는 걸까요?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새 언약’인가 말입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여기서도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확인함으로써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은 유효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에는 하느님이 당신의 계명을 ‘돌판’에 새겨주셨는데 이번에는 백성들의 ‘가슴속’에 넣어주고 ‘마음 판’에 새겨 주시겠다고 한 점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을 알자’고 말하지 말라

돌판 대신 마음 판이라! 그게 뭐 별 것인가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한 대로 예언자는 하느님의 가슴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하느님의 정열을 공유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느님이 당신의 계명을 과거처럼 돌판이 아니라 사람 가슴속에 넣어서 마음 판에 새겨주겠다니 어찌 의미심장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만 갖고는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그 뜻을 분명히 해 주는 구절이 바로 다음에 나오니 말입니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 집중하지 않고 무심코 지나치는데 이 구절은 절대로 그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다. ‘그때’는 하느님이 당신의 계명을 사람의 가슴속에 넣어주고 마음 판에 새겨주는 때를 가리킵니다. ‘그때’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할 겁니다. 예언서에는 ‘하느님을 알자, 힘써 하느님을 알자,’는 구절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야죠! 하느님을 아는 일이 어디 쉬운가요. 어려우니까 힘써 알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을 알자고 할 일이 없을 거랍니다. 왜인가 하면 그때는 작은 사람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느님을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작은 사람’과 ‘큰 사람’은 체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비전문가와 전문가, 또는 비종교인과 종교인 쯤 될까요, 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가방끈이 긴 사람과 짧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좌우간 하느님은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하느님을 알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하느님을 알자고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까닭은 우리 속마음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하느님이 알려주지 않는데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겠어. 그러니 열심히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해야지. 하느님이 저절로 알아지는 분도 아니고.... 우리가 어디 그럴 주제가 되나?’하는 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고 왜 이런가 말입니다.

저도 책을 몇 권 써보니 책 쓰는 사람에게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자기가 쓰려고 했던 주제에 대해 이미 누군가가 책을 써놓은 걸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이번에 고국 방문 중에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쓰려고 했던 바로 그런 책을 이미 누가 썼더군요. 이번에 홍인식 목사님에게 <우리 안에 가짜 하나님 죽이기>라는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스페인의 해방신학자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가 쓰고 홍 목사님이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을 며칠 만에 다 읽고 나서 저는 탄식했습니다. 바로 제가 쓰려고 했던 내용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사절이 지나면 이 책의 내용에 제 생각을 더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때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 보겠습니다. 왜 하느님은 당신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는지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감사절 후에 시리즈를 시작하기로 약속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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