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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11월 18일 "감사절 메시지)
글번호 : 781    조회 : 18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12-01 15:43:04   
 
2018년 11월 18일 / 추수감사주일

감사절 메시지
시편 146:1-10

곽건용 목사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 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3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4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8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9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시편 146:1-10).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아름답다

한 관광객이 작은 어촌의 평화로운 장면을 사진 찍고 있는데 남루한 한 사람이 파도에 흔들리는 낚싯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그의 렌즈에 잡혔습니다. 그가 셔터를 누르자 어부가 잠에서 깼습니다. 관광객은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날씨도 좋은데 왜 당신은 물고기를 잡지 않고 빈둥거리시오?”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벌써 아침에 넉넉히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관광객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시오. 만일 당신이 하루에 서너 번 출항한다면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 않겠소. 그러면 어떻게 되겠소?” 어부는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반문했지요. 관광객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일 년쯤 지나면 당신은 통통배 한 척을 살 수 있을 거고 이 년만 고생하면 배를 한 척 더 사겠지요. 언젠가는 냉동 창고나 훈제가공공장을 살 수도 있을 테고 당신 물고기를 대도시까지 싣고 갈 트럭도 여러 대 살 수 있을 거요.” 어부가 기대에 찬 음성으로 “그 다음은요?”라고 묻자 관광객은 더 의기양양해져서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조용하고 멋진 해변에 앉아 햇볕을 쬐고 졸면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을 거요.” 그러자 어부는 크게 실망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던 거 아니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얘기지만 하인리히 뵐이 했다니까 좀 있어 보이지요?

한 늙은 구두쇠가 까마귀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까마귀는 동전만 보면 물어다가 벽속의 구멍에 숨겨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옆집 고양이가 까마귀에게 물었습니다. “그 반짝이는 동그란 물건들은 네게 아무 쓸모도 없는데 왜 열심히 물어다 숨기냐?” 까마귀가 대답했습니다. “내 주인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지 뭐. 주인에게도 돈이 가득 들어 있는 돈궤가 있지만 나처럼 쓰지 않거든.”

산길을 걸을 때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향기를 음미하며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꽃들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그걸 꺾어서 자기 집으로 갖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들꽃을 꺾어다가 자기 집을 장식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걸까요?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들꽃을 꺾어다 자기 집을 장식하는 사람은 그 들꽃이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생각해봤을까요. 꽃을 피운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과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떠올려봤을까요. 꽃을 스쳐지나간 바람의 속삭임과 꽃 위에 머물렀던 이슬의 노래가 들린다면 차마 꽃을 꺾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물며 우주를 감싸고 있는 조물주의 입김과 체온이야 말해야 뭐하겠습니까. 그가 그걸 느꼈다면 들꽃을 꺾을 리 만무하겠지요.

집안에 빵을 잔뜩 쌓아두었다고 해서 빵맛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빵 냄새는 맡겠지만 빵맛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빵을 손에 쥐기까지 이어진 자연의 온갖 조화와 농부의 수고, 그리고 빵을 쥔 내 손에 노동에서 비롯된 땀과 눈물이 묻어 있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빵맛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곳간에 소출을 가득 쌓아놓고 즐길 생각에 부풀어 있던 부자에게 “오늘 밤 그대의 영혼을 하느님이 가져가신다면 어찌 하려 하오.”라며 혀를 차셨습니다. 예수님은 곳간 가득 쌓여 있는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절실한 기도이고 부자에게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한 톨의 쌀알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빵에는 영성(靈性)이 있습니다. 빵은 영물(靈物)입니다. 우리 조상은 밥은 하늘이요 우주라고 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도 같은 뜻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감사절은 모두의 축제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신데렐라나 콩쥐팥쥐 얘기가 세계 여러 족속에 널리 퍼져 있듯이 추수감사축제도 거의 모든 종족이 지키는 공통의 축제입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어떤 신이든 상관없이,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종족까지도 추수를 끝내면 모두 모여서 흥겹게 즐기며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습니다. 우리 겨레도 오래 전부터 창조주에게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오랫동안 11월 중순이나 말에 오는 미국 추수감사절을 지켜왔지만 최근에는 추석 전후나 11월 초에 지키는 교회가 늘어났습니다. 왜 11월 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기에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한국 기독교인’이므로 우리의 정체성에는 ‘미국’과 ‘한국사람’과 ‘기독교인’이라는 세 갈래의 전통이 합류해 들어와 있습니다. 저는 오늘 감사의 축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세 갈래 전통들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짚어 보면서 감사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구약성서의 추수감사절은 신명기 16장에 전해지는 초막절에서 유래됩니다. 초막절은 곡식에 낫을 대기 시작한 날로부터 일곱 주간 지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며 즐기는 축제였습니다. 성서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손으로 일하여 거두는 소출에 복을 내려주시는데 어찌하여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이 날에는 흥겹게 먹고 마시며 마음껏 즐기라고 했습니다. 단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아들과 딸 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또 너희와 한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있는 떠돌이, 고아, 과부까지도 데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함께 즐겨라. 너희는 이집트에서 종노릇한 일을 잊지 말아라.

이 날만큼은 평소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도 빠짐없이 모두 축제에 참여시키라고 했습니다. 초막절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라는 겁니다. 가진 자들만의 축제, ‘자격’ 있는 사람들만의 축제, 그 ‘자격’이란 게 뭐가 됐든 간에 상관없이 자격 있는 사람들만의 축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나라의 잔치를 미리 보여주는 초막절 축제는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모두의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11월 셋째 주일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에게 유래된 미국의 추수감사축제입니다. 갖은 어려움을 이기고 첫 곡식을 거두어 감사의 제단을 차린 후 이들은 소출에 대해서만 아니라 그들이 획득한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포함해서 자유를 획득하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넜으니 말입니다.

‘자유’는 이곳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게 아닙니다. 넉넉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 땅에는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이 나라 정부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방해하고 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만족하지 말고 그걸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남이 자유롭지 않으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남이 자유로울 때 비로소 나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겨레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추수감사축제 전통입니다.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창조주와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축제의 절기를 지켜왔습니다. 기독교를 우리 겨레에 전해준 서구 선교사들이 이 축제와 제사를 ‘조상숭배’라고 오해하고 기독교 정신에 맞지 않는다면서 금지했지만 우리 겨레는 조상을 숭배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조상들에게 감사했을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적 삶의 터전을 물려줬을 뿐 아니라 정신적 풍성함까지 물려준 창조주와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축제를 벌였던 겁니다.

이와 같은 우리 겨레의 전통은 자연세계 곳곳에 서려 있는 창조주의 영을 느끼면 감사했던 미 대륙 원주민들의 영성 전통과도 통합니다. 감사절이 오면 자주 찾아 읽곤 하는 글을 잠깐 읽겠습니다. 두와미쉬족 시애틀 추장이 그들의 땅을 팔라고 강요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 백성들에게는 이 땅 구석구석이 모두 거룩합니다. 우리들의 기억과 체험 속에서는 반짝이는 솔 이파리 모두가, 모래에 수놓아진 바닷가 전체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속의 안개 전체가, 자유롭게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모든 곤충이 거룩합니다... 만일 우리가 당신들에게 이 땅을 판다면 당신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땅이 거룩하다는 것을. 호수들의 맑은 물에 비춰지는 신령스런 영상 하나하나는 내 동족의 삶의 역사에 담긴 사건들과 기억들을 얘기해준다는 것을... 당신들은 공기가 거룩하다는 것을, 공기는 자신의 생명력을 공급해주는 모든 생명체와 자신의 영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께 첫 호흡을 허락해준 그 바람이 또한 우리의 마지막 숨을 받아 안습니다...

감사하는 삶이란?

여러분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감사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감사는 기독교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신앙의 미덕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감사는 ‘미덕’을 넘어서서 ‘의무’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감사는 ‘미덕’이거나 그걸 넘어서는 신앙인의 마땅한 ‘의무’입니까? 감사하지 않으면 ‘부덕’이나 ‘의무불이행’의 죄를 짓는 겁니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봅시다. 내가 남에게 은혜를 입힌 사람이라면, 뭔가 베풀어줄 사람이라면 이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내게 감사하지 않는다고 기분이 나쁘게나 괜히 베풀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은혜를 베푼 게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어떤 모양으로든 되받을 생각을 하고 베풀었다면 그건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진정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베풀고 나서 베풀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한 선행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걸 미주알고주알 장부에 적어뒀다가 되돌려 받으려 한다면 그게 무슨 은혜를 베푼 것인가 말입니다.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상대방이 감사하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베푼 다음에 잊어버렸다면 섭섭하고 말 것도 없겠지요.

저는 하느님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나서 쩨쩨하게 ‘이 녀석이 감사하나 안 하나 보자.’는 식으로 눈 크게 뜨고 지켜보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녀석이 내가 준 게 아직 선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네. 좀 더 줘볼까.’라고 생각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매사에 받은 은총을 잊지 말고, 장부에 잘 적어두면서 빠짐없이 감사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 있습니까.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가는 신경 줄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위가 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무슨 ‘선행’이란 걸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그게 굳이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지라는 뜻일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요? 그건 내가 하느님이 하시는 것처럼 은총을 베푼다는 의식 없이, 선행을 행한다는 생각 없이 남 좋은 일을 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감사하는 삶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때문에’ 하는 감사입니다. 내게 뭔가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겁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입니다. 내게 역경이 닥쳐와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는 겁니다. 이런 감사도 사실 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때문에’를 전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때문에’가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습니다. 마지막은 ‘범사에 감사’인데 이에 대해서는 방금 얘기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사실상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되받을 생각 없이 은총을 베풀어주셨으니 우리는 거기에 대해 무엇인가로 되갚으려 하지 말고 남에게 하느님이 하신 것처럼 하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감사한 죄?

한때 노동시인이었고 지금은 명상가에 가깝게 된 박노해의 ‘감사한 죄’라는 시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낸 장하신 어머니
눈도 귀도 어두워져 홀로 사는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나는 한평생 기도로 살아왔느니라
낯선 서울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쫓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아비도 없이 가난 속에 연좌제에 묶인 내 새끼들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경우 바르게 자라나서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느님께 바치고
너희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나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왔느니라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 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묵주를 손에 쥐고 흐느끼신다
감사한 죄
감사한 죄
아아 감사한 죄

‘감사’라는 것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하기 쉬움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지금 생생히 진행 중인 사람도 있겠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과거의 일인 사람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될까요? 그걸 깨닫게 되는 방법이 뭘까요? 여러분으로 하여금 ‘내가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고 확신하게 만든 것이 뭡니까? 같이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이 밝아지는 겁니까? 못 보면 신경질이 날카로워지는 것입니까? 누가 이렇게 얘기하네요. 안 보면 궁금해지면 그게 사랑이라고.

저는 하느님과의 사랑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나 알게 됐을 때는 하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올랐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응답이 없으면 불안하고 섭섭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사랑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이 응답도 않으시고 너무 조용하고 심지어 곁에 안 계시다는 느낌이 들 때도 불안하거나 화가 나지 않고 ‘지금 이분이 뭘 하고 계실까? 무엇 하고 계시기에 이렇듯 대답이 없으실까?’하며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심껏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처음에는 섭섭하고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믿음이 깊어지면서 ‘내 기도를 들어주면 다른 이에게 손해가 되나보다, 나보다 더 기도를 들어줘야 할 급한 이가 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지나가니까 이제는 그냥 궁금합니다. ‘지금 하느님은 뭐하고 계시나.’ 하는 궁금증 말입니다. 이젠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해서 특별히 감사하다는 마음도 들지 않고 안 들어주셨다고 해서 서운하지도 않습니다. ‘뭐 대단히 중요한 다른 일이 있어서 내게 이러실까?’ 하는 궁금증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때문에’ 감사하는 신자가 되기기 바랍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신자로 자라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범사에 감사’하는, 아니 그래서 ‘감사하지 않는’ 또는 하느님과 사랑하는 관계에 빠져서 감사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 부질없어지는 그런 신자로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Happy Thanksgiv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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