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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11월 25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진짜 하느님인가?" (가짜 하느님 죽이기 1)
글번호 : 782    조회 : 32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12-01 15:44:07   
 
2018년 11월 25일 / 성령강림절 스물여덟 번째 주일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진짜 하느님인가?
누가 13:1-5

곽건용 목사

1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합니까? 3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 4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5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누가 13:1-5)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에 <사이더 하우스 룰스 The Cider House Rule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20년대 미국 메인 주 뉴잉글랜드의 한 시골 고아원이 이 영화의 무대입니다. 거기에는 한 명의 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가 있어 부득이하게 낙태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낙태수술을 해주고 그들이 데려가지 않은 아이들을 기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를 입양하러 오는 부모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잘 보여서 입양되어 가려고 안쓰러울 정도로 애를 씁니다. 아이가 입양되어 간 날 밤에는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 일상인 곳입니다.

거기에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결함을 갖고 태어난 퍼지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공기를 통한 오염을 예방하려고 만든 통 안에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원장 의사와 아이들에 중 나이가 많은 아이가 함께 고아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땅을 파고 퍼지를 묻다가 원장이 아이에게 “아이들이 퍼지가 어디 갔냐고 물으면 좋은 부모를 만나 입양됐다고 대답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이가 원장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이들이 그 말을 믿을까요?” 그러자 원장은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을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마련이니까(People believe what they want to believe).”

얼마 전에 캐나다 개신교 최대교단인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가 무신론을 주장한 목사에게 목회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얼른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캐나다에서 벌어졌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밝힌 토론토의 그레타 보스퍼 목사와 합의하여 그녀가 목회하던 교회를 계속 목회할 수 있게 했다는 겁니다. 그녀는 17년 전인 2001년에 회중들 앞에서 “나는 신을 개념(concept)으로는 믿지만 인간사에 개입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믿지는 않는다.”고 밝혔고 그 후 교인수가 150명에서 40명으로 감소했지만 교단은 그녀의 목회를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교인들은 보스퍼 목사를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지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캐나다연합교회는 어디나 있을 수 있는 급진적인 신학성향을 갖고 있는 소수교단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 교단은 캐나다를 대표하는 최대 개신교단입니다.

‘어떤’ 하느님이냐가 중요하다

두 얘기는 오늘날 유신론 종교가 처해 있는 곤혹스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얘기했습니다. 요즘은 사람은 누구나 믿고 싶은 걸 믿는 세상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개념으로는 믿지만 인간사에 개입하는 초월적 존재로서는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목사로서 교회에서 목회하는 세상입니다. 물론 후자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게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쪽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물음은 ‘어떤’ 하느님을 믿거나 믿지 않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말라 하기 전에 마땅히 물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묻지 않은 질문은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은 누구인가, 어떤 하느님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상당기간 동안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서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 전에 입문에 해당하는 얘기를 하려 합니다. 오늘 얘기를 두괄식으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최종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아무리 논리정연하게 말한다 해도, 또는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을 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사람의’ 말이고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하느님에 대한 ‘불신’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인데,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데, 하느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미지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확장되는데 어찌 하느님에 대해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여백에 있다고 말들 합니다. 서양화는 화면을 꽉 채우지만 동양화는 여백을 두고 그 여백에 많은 게 담겨 있듯이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할 때는 채워져 있는 부분보다는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해서 ‘확신’이란 걸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다 저렇다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하느님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신비의 영역이 확장되는 분인데 말입니다.

하느님은 ‘존재’에 묶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오랫동안 기독교 안에서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우 낯설었던 게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는 하느님은 철학적으로, 특히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철학의 틀 안에서 사고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세하게 얘기하려면 한이 없지만 무리를 무릅쓰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머릿속에서만’ 하느님을 알아왔던 겁니다. 성서 구절들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것은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결론내린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구절들을 끌어들인 데 불과했습니다. 성서의 하느님과 철학의 하느님의 차이에 대해 한 가지만 예를 들어 얘기해보겠습니다.

철학에서는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중요하게 다뤄왔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철학적 신학이 규명해야 하는 최대과제였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저명한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다양한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눈곱만큼도 관심 없습니다. 오랫동안 그 이유는 성서가 하느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존재’와 ‘비존재’ being과 non-being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12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6절).

성서의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물의 존재 방식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에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일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신다고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은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뭔가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사람의 삶 속에 존재하며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 내거나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사건과 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방식으로만 알려지는 분입니다. 모두 사람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삶 전체가 달라진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이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의 대부분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흔히 우리는 하느님을 심판자요 잘못한 사람을 벌주는 분, 그래서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인 짐을 잔뜩 짊어지게 하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하느님을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좁고 제한된 경험에서 비롯된 유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때로는 가학적인 신 개념이 정작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경험했든지 그것은 코끼리 만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주로 교회에서 목사들에 의해 주입된 것입니다. 그렇게 주입된 생각은 대체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가학적이고 심판적인 생각이거나 무거운 도덕적 짐을 짊어지게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서 무신론이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말할 때 아무 수식어도 붙어 있지 않은 하느님이 아니라 ‘어떤’ 하느님인가를 따져야 하듯이 무신론을 말할 때도 ‘어떤’ 하느님을 믿지 않느냐를 따져봐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무신론은 특정한 신에 대한 부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을 결코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은 취향을 바꾸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은 머리에서만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가슴과 삶의 변화가 동반되는 일이고 가치관과 삶 전체에 대한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 할 때 두려움과 불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변화가 내 삶 전체에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이런 모험은 분명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저도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내 삶 전체와 가치관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합니다. 가짜 하느님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짜 하느님을 살려내는 데까지 나아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얘기할 텐데 다음 주일에는 ‘공포의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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