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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12월 16일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 (가짜 하느님 죽이기 4)
글번호 : 785    조회 : 33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12-24 09:31:12   
 
2018년 12월 16일 / 대림절 셋째 주일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4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
누가 12:6-7

곽건용 목사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그대들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대들은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합니다."(누가 12:6-7)

믿음이 적었더라면 안 죽었을까?

신앙 좋은 한 어머니의 아이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아이의 장례식에서 목사가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집사님이 믿음이 좋아서 이런 시련을 주신 겁니다. 하느님은 집사님이 이 시련을 극복하실 줄 알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럼 내가 믿음이 약했더라면 내 아이는 안 죽었겠네.”

기독교에는 ‘섭리’(攝理 providen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철학에서 ‘섭리’는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우린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고, 기독교 안에서 섭리는 ‘하느님은 자연세계와 인간의 역사를 자애로운 원칙에 따라 이끄시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나 혼돈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특정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일으킨다고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좋은 일은 물론이고 나쁜 일과 불행한 일까지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믿음이 바로 ‘섭리’입니다. 위의 얘기에서 목사는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고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의도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의 믿음을 시험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녀가 그쯤의 불행은 극복할 줄 알았기에 그런 사고가 일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세상에 자녀를 잃는 불행을 극복할 신앙 좋은 어머니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이는 극단적인 얘기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믿는 기독교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런 믿음을 좋은 믿음이라고, 훌륭하고 본받아야 할 믿음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일어났다고 믿는 겁니다. 암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는 것 같이 불행한 일은 물론이고 복권에 당첨되거나 갖고 있던 땅값이 갑자기 오르거니 시험에서 모르고 찍었는데 맞는 것 같은 행운도 모두 하느님이 의도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성서에도 그런 믿음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욥은 갖고 있던 재산과 자녀들을 졸지에 다 잃고서도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1:21). 축복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고 그 축복을 ‘가져가신 분’도 하느님이니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할 뿐이라니, 이 얼마나 좋은 신앙이냐는 겁니다.

하느님은 머리카락까지 세신 분?

또한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은 우리들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이 그 정도로 꼼꼼한 분인데 세상에 그분의 계획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이 어디 있느냐, 우리네 인생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걸로 들립니다. 75억 명 인구의 머리카락을 모두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상상할 수 없는 숫자겠지요. 게다가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는 매일 달라집니다. 그것까지 염두에 두면 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가 나오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용서할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고 490번을 헤아려서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제정신이라 할 수는 없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고 계신다고 해서 숫자 계산을 하려는 짓도 미친 짓임에 분명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했을 때는 하느님이 꼬치꼬치 우리네 삶을 간섭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다 세실 정도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주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려던 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느님이 그렇게 원하셨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믿음, 곧 비록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이 분명한 계획과 이유와 목적을 갖고 그렇게 일으키시는 것이란 믿음은 일견 그럴듯해 보입니다. 좋은 신앙처럼 보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믿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만사는 필연이 아니면 우연인데 하느님 믿는 사람에게 우연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신앙을 의심받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세상만사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정말 당신 자식이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다면 욥처럼 생각하겠는가? 하느님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아니면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데려가셨다고 믿는가?”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그런 일이 자기에게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믿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걸 겁니다. 물론 그렇게 믿을 근거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반면 그와 같은 불행은 하느님의 계획과는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도 똑같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Why me? 왜 하필 내게?”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도 세상만사를 하느님이 일으킨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겁니다.

사람은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의 꼭두각시?

저는 이번 기회에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오랫동안 좋은 기독교 신앙으로 여겨져 왔던 믿음, 곧 세상만사 모든 일을 모두 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하느님께서 이유와 목적을 갖고 일으키시는 것이란 신앙은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런 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는 것은 옳지 않은 신앙입니다. 분명하게 말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은 부족한 신앙도 아니고 넘치는 신앙도 아닌, 잘못된 신앙입니다.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의 말을 빌리면 참된 하느님이 아니라 잘못된 우상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런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머리로는 이런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벗어버리지 못할까요? 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의 문제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신앙의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막히니까 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꼬치꼬치 따져 묻는 게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오랜 교회의 관습도 작용합니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게 좋다는 생각 말입니다. 게다가 기껏 그런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만 ‘그럼 어떤 신앙이 바람직한 좋은 신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번에 저는 세상만사 하나하나를 모두 하느님이 원하셔서 일으키신다는 믿음의 문제점을 분명히 밝히고 그렇다면 올바른 신앙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최선을 다해 확실히 얘기하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의 두 번째 소주제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매사에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이냐, 아니면 넌지시 지켜보시는 하느님이냐’입니다. 이 물음은 시리즈 첫 번째 소주제인 ‘두려움과 공포의 하느님이냐 사랑의 하느님이냐’의 물음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하느님은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넌지시 지켜보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이번 소주제를 다 다룬 후에 결론적으로 할 말이고 일단 오늘은 하느님을 매사에 꼬치꼬치 간섭하는 분으로 믿는 신앙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의도하든지 의도하지 않든지, 사람을 하느님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로봇으로 전락시킨다는 겁니다. 만일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이 원했기에 벌어졌고, 모든 사건과 일들이 하느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그래서 사람은 그렇게 하느님이 결정하신 대로 따라야 하는 존재라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요 하느님 및 세상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성서적 인간관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주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느님이 촘촘하게 쳐놓은 그물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물 마시기 싫다는 말을 억지로 물가로 끌고 가서 강제로 물을 먹이는 분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소돔 성의 멸망을 두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느냐는 아브라함의 항의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은 소돔성의 의인 숫자를 두고 50명에서 시작해서 10명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과 ‘협상’을 벌이셨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느님은 야곱과 밤새 씨름을 한 끝에 힘으로는 그를 당할 수 없는 걸 알고 환도 뼈를 치는 반칙을 저지르고서야 비로소 풀려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얘기들이 뭘 보여줍니까? 하느님 앞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자기 주관이 강하고 의지를 내세우는 존재인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헤셀은 “하느님은 사람의 순종을 원하시지만 그것을 강요하시지는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강요할 능력이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인지는 다음 설교에서 얘기하겠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사람의 순종을 강요하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 시야를 좁게 만드는 잘못된 신앙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이 세상만사를 미리 정하셨고 정하신 대로 이끌어나간다면 사람은 결국 하느님이 쳐놓은 그물 안에 갇힌 채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생각은 성서가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잘못된 섭리 신앙은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을 매우 좁게 만들어버립니다.

지난주에 한국에서 KTX 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그 사고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런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 하느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크게 쓰시려고 자기를 살려주셨다고 믿고 그렇게 이른바 신앙 간증을 하고 돌아다닌다면 그게 바른 신앙일까요? 그렇다면 사고에서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 밖에 있는 사람들인가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크게 쓰일 데도 없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서 죽었습니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느님이 살아난 사람만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생각은 뭘 근거로 하나요? 다른 것은 안 보고 오로지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게 옳을까요? 우리는 이른바 ‘신앙 간증’이란 것을 ‘멋지게’ 한 사람들이 감옥 가는 걸 많이 봐왔습니다.

욥은 자기가 겪은 축복과 느닷없이 닥친 불행에 대해 주신 분도 하느님이고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느님이니 오직 하느님만 찬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욥은 섭리주의자를 넘어서서 운명론자인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오직 하느님이 하시는 일로서 자기는 아무런 권한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고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욥기 3장부터 하느님은 자기가 겪는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 더 할 나위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신성모독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항하고 대듭니다. 욥이 ‘주신 분도 하느님,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느님’이라고만 믿었다고 여기면 그를 크게 오해한 겁니다. 욥은 3장 이후에서 자기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하느님께 격렬하게 저항하니 말입니다.

만일 세상만사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대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우리가 뭐라고 거기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 부시 같은 자가 마구 전쟁을 일으키고, 이명박 같은 사람이 나랏돈을 다 빼먹어도, 박근혜, 최순실 같은 사람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농단해도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일들조차 죄다 하느님이 미리 예정하고 계획한 대로 벌어지는 것일 따름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은 반드시 변해야 할 현실을 무시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은폐하는 도구가 될 따름입니다. 그야말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세상만사가 하느님의 계획과 의도대로 일어난다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고 우상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거짓 신앙은 가장 그럴듯한 신앙입니다. ‘일견’ 그럴 듯 해 보이는 신앙, 그것이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99%가 진실이고 1%가 거짓인 신앙이 가장 위험합니다.

넌지시 지켜보시는 하느님

예수님도 이런 신앙의 위험성을 경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희생 제물에 섞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예수님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어서 죽은 게 아니라면서 “내가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라고 똑같이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회개’가 뭘 의미하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그건 차치하고라도 분명한 사실은 변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답시고 “잘 생각해봐라.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졌을지 누가 아느냐? 그 때문에 네가 이런 고난을 겪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염장을 지른 거죠. 하긴 그런 식으로 갖다 붙이면 거기서 자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에게 감추고 있는 죄 몇 가지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얘기하신 게 아닙니다. 세상에는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벌어지는 불행도 있습니다. 반대로 미덕과는 아무 상관없는 복도 있겠지요. 여기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내 삶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매사에 꼬치꼬치 참견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심지어는 강제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게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럼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요? 저는 마르도네스의 책 제목과는 달리 ‘넌지시 지켜보는 하느님’이라고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꼬치꼬치 참견하는 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한 분, 우리네 삶에 상관하지 않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좀 떨어진 곳에 계시면서 넌지시 우리 삶을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물론 이 또한 은유적인 표현인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3주 후에 계속하겠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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