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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12월 23일 "성탄절 메시지"
글번호 : 786    조회 : 88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12-24 09:32:05   
 
2018년 12월 23일 / 성탄주일

성탄절 메시지
누가 2:8-14

곽건용 목사

8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그대들에게 전하여 줍니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그대들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12 그대들은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표징입니다." 13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14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누가 2:8-14)

예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성탄절 이야기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느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존재하고 있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믿는 종교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작년까지 저는 성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순히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설교를 한 후로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사랑이 몸을 입고 사람이 된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사랑의 생일날’입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는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초자연적이고 불가능한 얘기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가 성탄시즌에 교회 구역 식구들이 모여 구역성서공부는 하는데 예수의 처녀 탄생을 놓고 한 사람이 계속 트집을 잡아서 진행이 안 됐답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는 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그런 걸 믿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논쟁을 한참 듣고 있던 구봉서 장로가 한 마디로 논쟁을 정리해버렸다고 합니다. “야, 자기 서방이 괜찮다는데 왜 네가 야단이야?”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눈에 띠는 네 여성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까지 여성은 족보에 넣지 않았는데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네 명의 여자들을, 그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문제가 많은’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를 포함시켰습니다. 다말은 창세기 38장에 등장하는 유다의 며느리로서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은 낳은 엽기적인 행위를 한 여인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어 마땅한 인물인데 예수님의 족보에 보란 듯이 들어가 있습니다. 라합과 룻은 모두 이방여인입니다. 라합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그들을 도왔던 창녀였고, 룻은 이스라엘사람과 결혼한 모압 여인입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알다시피 다윗과 불륜관계였다가 나중에 아내가 된 여인입니다. 하나 같이 ‘문제 있는’ 여인들입니다.

다음으로 세 명의 동방박사와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서 먼 길을 여행한 끝에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물을 바친 사람들이고, 헤롯 왕은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한 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우환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려고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살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자입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헤롯의 명을 받아 예언서를 샅샅이 뒤진 끝에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지식으로 보면 동방박사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헤롯에 의해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입니다. 박사들이 꿈에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그대로 행하자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걸 알고 아기가 태어난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 근방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마태는 이들을 위해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하는구나.”(2:18)라는 조가(弔歌)를 남겼습니다.

누가복음으로 넘어오면 먼저 목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베들레헴 근처 들에서 밤새 양을 지키고 있다가 천사에게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듣고 여관으로 달려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다음에 시므온과 안나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 탄생 여드레 만에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거기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구세주를 보리라는 약속을 받고 날마다 성전에 나가 기다리다가 마침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감격해서 이렇게 찬양했다고 합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길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리아에게 이런 예언의 말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입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한편 안나는 나이 많은 여예언자로서 금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기다가 아기 예수를 만난 후 사람들에게 아기에 대해 얘기했다고 합니다.

기대치 않던 기쁜 소식

이 사람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면면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예수 탄생에 대해 보여준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같은 사건도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나 봅니다.

헤롯 왕은 로마황제를 등에 업고 자기 구역 안에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동방박사들에게 보인 모습은 그의 권력기반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박사들ㅡ이 얘기를 듣고 두려웠습니다. 자기가 엄연히 유대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 다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그는 두려움에 빠졌던 겁니다. 이렇듯 폭정을 펴는 독재자는 두려워서 강압적이 되고 폭력을 사용합니다. 그가 극악한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그의 권력은 이미 저물어가고 있는 겁니다. 헤롯은 아기를 죽여 우환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려 했고 그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베들레헴 인근에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했습니다. 그에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두려운 소식’이었던 겁니다.

다음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께 와서 경배한 반면 유대인 학자였던 이들은 헤롯의 의도를 짐작했으면서도 자기들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헤롯을 도왔습니다. 이번 금요독서모임에서는 현경 교수의 책을 통해 아랍과 중동을 공부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봤습니다. 사이드는 피식민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최강대국 미국에서 교수로 살다간 지식인으로서 피식민지 조국을 위해 실천하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많은 걸 얘기했습니다. 프란츠 파농은 헤롯 궁전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처럼 식민주의자들을 돕는 지식인을 가리켜 ‘식민화된 지식인’(colonized intellectual)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를 위해 자기가 가진 지식을 팔아먹는 자들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을 많이 알았고 그래서 그 지식으로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어떤 소식이었을까요?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아니면 헤롯에게처럼 두려운 소식이었을까요? 자기들이 누려온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질서와 체제를 흔들 수 있는 ‘달갑지 않고 귀찮은 소식’이었을까요?

동방박사들과 시므온, 안나는 모두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박사들이 공연히 별을 살폈겠습니까. 뭔가 간절히 바라는 게 있었겠지요. 그런 간절한 심정으로 하늘의 별을 살피던 박사들이나 생전에 메시아를 보리라는 약속을 받고 날마다 성전에 나와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는 방법은 달랐지만 뭔가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늘 있어왔습니다. 이들에게 메시아의 탄생 소식은 ‘소원이 성취되는 소식’이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자들이 있습니다. 당시 최하층 사람들이던 그들은 밤을 세워가며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율법의 명령이기보다는 일종의 ‘사치’였습니다. 안식일이라고 양떼를 굶길 수는 없었으니 이들은 양떼를 몰고 들로 나가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원천적으로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었고 그래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갓난아이가 구세주란 소식은 이들에게 뭘 의미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보란 듯이 화려하게 세상에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이라고 달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이들도 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믿음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사실 이들은 매일의 삶에 부대껴 그런 믿음조차 이들에게는 사치였을 수도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 이들이 천사의 지시를 받고 갔던 곳은 초라한 여관, 그것도 객실이 아닌 마구간이었고 거기서 그들이 본 것은 누더기 강보에 싸여 더러운 발 밥통에 누워 있는 아기였습니다. 만일 아기가 거기가 아니라 별 다섯 개짜리 호화호텔에서 태어났다면 이들이 아기를 볼 수나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문지기에게 저지당했을 게 분명합니다. 천사의 지시를 받아 왔다고 말해도 문지기는 코웃음을 쳤겠지요.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 소식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닥친 놀랍고 신기한 소식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 메시아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리란 예언도 알 턱이 없는 목자들의 눈으로 본 메시아의 탄생은 그 일이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몰라도 좌우간 뭔가 좋은 일이, 엄청나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메시아가 호화호텔이 아닌 초라한 여관에, 그것도 지저분한 마구간의 더러운 말 밥통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분이 ‘잘나신 분들’에게만 좋은 소식이 아니라 자기들 같은 ‘밑바닥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만드는 소식이었을 겁니다.

우리에게 예수 탄생은 어떤 소식인가?

여러분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어떤 소식입니까? 헤롯 왕에게처럼 ‘두려운 소식’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처럼 ‘달갑지 않은 소식’입니까? 그것도 아닐 겁니다. 동방박사나 시므온, 안나에게처럼 일생의 기다림이 성취되는 ‘기쁜 소식’입니까?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간절하게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은 솔직히 아니지 않습니까. 목자들에게 그랬듯이 잘은 모르지만 뭔가 가슴 설레게 하고 기대와 희망을 갖게 만드는 ‘의외의 반가운 소식’입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합니다. 헤롯은 죽는 날까지 권력투쟁하면서 하루도 맘 편한 날 없이 살다 죽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꼬투리 잡아 예수를 올무에 잡아넣을 죽일까를 궁리하며 살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 그때의 감격을 되새기며 살았겠지요. 시므온과 안나는 평생소원을 풀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품고 평안히 눈을 감았을 겁니다.

궁금한 점은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기 예수와의 만남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졌을까요? 이 경험은 그들을 변화시켰을까요? 변화시켰다면 어떻게 변화시켰을까요? 저는 이게 궁금합니다. 저는 예수님 생전에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 열두 제자뿐 아니라 이름도 명예도 없이 그저 묵묵히 예수를 따랐던 민초들에게서 저는 그 목자들을 봅니다. 세상을 위한 복된 소식인 예수의 하느님나라 복음이 사그라질 듯 사그라질 듯 하다가도 꿋꿋이 되살아났던 것은 사도들만의 덕분도 아니고 교부들을 비롯한 이른바 교회의 지도자들만의 몫도 아니고 이들처럼 이름도 명예도 없이 각자 놓여 있는 자리에서 꿋꿋하게 복음의 삶을 살다 간 민초들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예수 탄생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람들은 이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헤롯의 악행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 때 베들레헴 근방에 살았고 두 살 이하의 아들을 뒀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 말입니다. 이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가슴 찢어지는 고통스런 소식이었습니다. ‘마음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란 시므온의 예언은 마리아보다 먼저 이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기쁜 소식은 절로 주어지지만은 않습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복음에서 서술형과 명령형은 별개가 아닙니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현실을 서술하는 것은 곧 그런 현실을 만들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라고 하는 서술형은 곧 그런 현실을 만들라는 명령이기도 하다는 얘기입니다.

지금도 베들레헴 근방에서 아들을 잃고 통곡했던 부모들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성탄이 세월호 참사 후 다섯 번째 맞이하는 성탄입니다. 그때 자녀를 잃은 부모들에게 다섯 번째 맞는 성탄은 어떤 소식일까요? 얼마 전에 고국에서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잘려나가 죽었습니다. 수차례에 걸쳐 위험을 경고했지만 회사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번 성탄은 기쁜 소식이 아닐 겁니다. 그걸 기쁜 소식으로 만들 책임과 소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서술형을 우리는 명령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이런 분들에게까지 기쁜 소식이 될 때까지, 구세주의 탄생 소식이 더 이상 아프고 고통스런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이 될 때까지 애쓰고 노력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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