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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1월 6일 "하느님과 씨름하는 한 해"
글번호 : 788    조회 : 145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1-08 09:36:59   
 
2019년 1월 6일 / 신년주일

하느님과 씨름하는 한 해
창세기 32:22-31

곽건용 목사

22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23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보내고 난 다음에, 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26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창세기 32:22-31).

새해 벽두에

새해가 밝았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보낼 준비가 채 안 된 상태에서 묵은해를 보내고 얼떨결에 새해를 맞았습니다. 2018년과 남다른 정을 나눈 것도 아닌데 왠지 보내기가 아쉽고 2019년이 다른 해보다 더 낯설지도 않은데도 왠지 생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기만 합니다. ‘새롭다’는 말은 ‘낯설다’는 말과도 통한다는데 2018년과 겨우 정을 붙였다 싶은데 어느덧 2019년이 ‘낯선 손님’처럼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새해 첫 날과 묵은해 마지막 날은 하나도 다를 것 없는데,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의 한 순간일 따름인데 새 날을 맞는 마음이 평범하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소원도 빌어보고 다짐도 해보면서 새 날을 맞곤 합니다. 새해 첫날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빌었고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꿈이 소박해지고 덜 적극적이 됩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고 소원을 이룰 에너지가 점점 줄어듦을 깨닫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이 들어가고 인생을 알아갈수록 인생에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음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이란 내 맘과 의지대로 펼쳐지는 게 아님을 깨닫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네 인생을 인도하신다고 믿지만 그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의외의 일이 벌어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돌아보면 2018년에도 좁게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랬고 넓게는 우리 겨레에게도 그랬는데, 참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우들이 맘을 쏟아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들이 모두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않겠지만 여러분도 다 그렇게 느낄 겁니다. 또한 우리 겨레의 운명도 그랬습니다. 재작년 2016년 말까지만 해도 미사일 실험과 핵실험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응징을 한다느니 하면서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유례없는 위기가 닥쳐왔지만 지난 1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던 북미정상회담이 종전 후 7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올해 우리 겨레의 앞날과 관련해서 큰 꿈을 꾸고 원대한 희망을 가져도 될 이유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본받을 것이 없는 야곱이란 사람

오늘은 2019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저는 27년 전인 1992년 첫 주일에 오늘의 본문 창세기 32장을 읽고 ‘하느님과 씨름하는 한 해’라는, 오늘의 제목과 같은 제목으로 처음으로 설교한 이래 이 설교를 여러 번 반복해왔습니다. 귀찮아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열 번도 더 했을 겁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설교할 소재가 없어져서가 아니라 다른 설교도 여러 번 해봤지만 새해 첫 설교로 이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야곱은 매우 독특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요셉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이 떠받드는 네 명의 조상들 중 한 사람인 야곱은 어디로 보나 본받을만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나 9백 마일을 걸어서 가나안 땅까지 온 사람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얻은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10대 후반의 나이에 늙은 아버지를 얼마든지 제압하여 번제물로 바쳐지는 걸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이삭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서 남의 나라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묵묵히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선하게 살아 결국에는 온 가족을 구원한 요셉과 같은 인격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독특성은 남달리 신앙이 깊다거나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남 못지않은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고난은 전적으로 그가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자업자득이었던 겁니다. 그의 생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를 들자면 자업자득, 초지일관, 사필귀정을 들 수 있고 속담을 들자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가 될 겁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쌍둥이 형 에서보다 먼저 세상에 나오려고 어머니 태중에서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사기꾼’ ‘거짓말쟁이’란 뜻도 있습니다. 아원을 따지고 들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과연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붙일까 싶습니다. 결국 그 이름은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는 생전에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야곱이란 말뜻처럼 평생 초지일관 거짓과 사기로 일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후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성서 해석자들은 이런 그의 삶을 어떻게든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꾸며보려고 노력해왔지만 아무리 치장해도 그 추함은 다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종족이든지 자기 조상의 약점은 감추고 좋은 점은 과장해서까지 드러내기 마련이고 야곱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서는 특이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가로챘고 형이 받아야 할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조차 가로챘습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추호의 거리낌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속은 걸 알게 된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그는 외삼촌이 사는 먼 곳으로 도망가 20여 년을 거기 머물러야 했습니다. 거기서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야곱은 자기 못지않게 형편없는 사람인 외삼촌 라반과 거짓말 경쟁을 벌였는데 속임수에서 한 수 위였던 야곱이 승리하는 걸로 결판이 났습니다.

그렇게 살던 야곱이 오랜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식과 종들도 여럿이 됐고 재산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형의 보복이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다고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형과의 만남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맞닥뜨려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형과의 만남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습니다. 형에게 줄 뇌물성 선물을 식구들과 함께 먼저 강 건너로 보내고 자기만 혼자 뒤처졌습니다. 선물은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한 것이었는데 가족들은 왜 먼저 건네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설마 그들은 형의 보복의 희생물이 된다 해도 자기는 살겠다고 그랬을까요? 설마 싶지만 야곱에게는 그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씨름하다

하지만 야곱은 형을 만나기 전에 전혀 예상치 않았던 ‘어떤 사람’과 먼저 만났습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는 형보다 훨씬 더 위험한 분으로서 다름 아닌 하느님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는 형을 피해 달아나던 길에 베델에서 꿈에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후, 라반의 집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뭔가를 청한 적도 없었고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지시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삼촌과 속고 속이는 추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의 삶에 전혀 개입하시지 않았던 겁니다. 그는 실천적인 무신론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얍복 나루터에 홀로 누웠을 때는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은 급하면 하느님을 찾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야곱도 그때만큼은 간절히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응답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떡 하니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델에서처럼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으로 나타나신 게 아니라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나타나신 하느님이 야곱이 기대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나는 네 편이니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줄 하느님을 바랬겠지만 정작 나타난 분은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하자고 덤벼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다짜고짜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야곱은 영문도 모른 채 이런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하느님과 맞서서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광경을 담은 그림 몇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본문에는 야곱과 씨름한 분을 ‘어떤 사람’이라고 했는데 마지막에 야곱이 씨름 상대방이 떠난 다음에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라고 말했던 걸로 보면 그는 씨름 상대방을 하느님이라고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야곱과 뒹굴며 씨름하는 하느님의 모습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온 하느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 아닙니까! 맘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뭐든지 식은 죽 먹기로 이루는 분, 저 높은 하늘에서 리모컨으로 사람의 역사를 원격조종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뒹굴고 씨름하며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참여하는 하느님, 사람의 허리춤을 맞잡고 끌고 당기며 씨름하는 하느님.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만난 하느님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이 되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 또는 복종을 중요한 신앙의 가치로 믿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도 순종이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풀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순종은 씨름도 해보지 않고 지레 하는 항복 선언이 아닙니다. 복종은 먼저 하느님의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한 후에 할 때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순종하기 전에 하느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고 하느님을 설득하는 일이며 동시에 하느님에게 설득당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논쟁과 설득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곱이 벌인 씨름입니다. 하느님이 내 뜻을 들어주시는 것은 내가 정성을 바치고 아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옳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득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지도 않은데 아부하고 정성을 바쳤다고 해서 하느님이 내 뜻을 들어주실 리 없습니다. 또한 설득되지도 않았는데 강압에 의해 순종한다면 거기에 마음과 영혼이 담길 리 없습니다. 그것은 가짜 순종이지요. 기도를 포함한 모든 신앙행위는 하느님과 씨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설득하는 일이고 하느님에게 설득당하는 일이 신앙인 겁니다.

밤새 이어진 씨름에서 야곱이 이겼습니다.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늘 사람이 이기는 건 아니지만 이 경우엔 야곱이 이겼습니다. 하느님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반칙’을 쓰셨습니다. 급소를 쳐서 야곱을 쓰러뜨린 겁니다. 하지만 야곱은 급소를 맞고 쓰러진 채 포기하지 않고 복을 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면서 하느님을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가 무슨 복을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그를 축복하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란 뜻을 가진 바로 그 이름이 축복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때로 우리가 구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축복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축복하시는 분임을 이 얘기는 보여줍니다. 성서에서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인격, 새로운 존재를 상징합니다. 이름이 바뀜은 존재가 바뀜을 상징합니다. 이름의 변화가 당장 야곱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않은 걸로 보이지만 후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 벅차오르게 감동했습니다.

먼 훗날에나 의미가 느껴질 변화를 당장 눈앞에서 보여준 상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절뚝거리며’ 걷게 됐다는 점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급소를 얻어맞은 후로 내내 절뚝거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겨뤄 이긴 흔적이었습니다. 하느님과 겨뤄 이긴 흔적이 ‘장애’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자기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바로 이걸 얘기한 게 아닐까요. 로마제국의 처절한 형틀이었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의 절뚝거림과 십자가, 그리고 바울에게 남겨진 예수의 흔적, 이렇게 구약과 신약은 서로 연결되는 걸까요. 야곱의 절뚝거림은 그가 새로운 존재가 됐다는 표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표지였지요. 예수의 흔적이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표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복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우쭐거리며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장애자로 살아가는 삶이 예수의 제자의 삶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면류관을 왕관처럼 쓰고 거들먹거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고통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난의 흔적을 안고 절뚝거리며 순례하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이요 예수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이 떠나가자 동편 하늘에서 해가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해를 바라보며 “내가 여기서 하느님과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라고 중얼거리며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은 ‘하느님의 얼굴’이란 뜻으로서 ‘하느님과 마주 대면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느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야곱이란 옛 존재도 떠나갔습니다. 남아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 사람은 평생을 절뚝거리며 살아갈 새로운 존재, 이스라엘이었습니다.

20019년 한 해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들께 권합니다. 하느님과 겨루며, 하느님과 씨름하며 삽시다. 하느님의 허리띠를 놓치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하느님과 씨름하며 살아갑시다. 그래서 절뚝거리며 삽시다. 박노해 시인의 ‘산정(山頂) 흰 이마’라는 시를 읽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눈이 내립니다.
흰 눈은 산 아래가 아니라 산 위에서 먼저 내립니다.
그러나 봄은 산 위가 아니라 저 아래 들녘에서 먼저 옵니다.
왜 퇴색하고 얼어붙는 것은 높은 곳이 먼저인가
왜 새로 오는 것은 낮고 너른 것이 먼저인가

산정의 흰 이마, 그 시린 눈 뜨고 있는 사람만이
한겨울 속에 이미 와 있는 새봄을 알아봅니다.
겨울이 있어 봄이 있고 겨울만이 희망을 낳을 수 있습니다.
제 언 살 터져가며 씨알 뿌리를 품에 안고 젖 물리는 참혹한 겨울 사랑만이
새 희망을 길러냅니다.
꽝꽝 얼어붙은 만큼 푸르른 불덩이로 살아 오릅니다.
겨울 삶이 없이는 생명의 봄도 오지 않습니다.

저 높은 산정은 꽃피는 자리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얼어붙고 최후까지 얼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가장 끝까지 시린 눈뜨고 지켜보는
‘기다림’의 자리입니다.
산정 흰 이마의 눈동자는 언제나 저 낮고 너른 발아래
이미 차오르는 봄빛에 눈 맞추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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