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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2월 17일 "강제하는 법? 자유하게 하는 법?" (가짜 하느님 죽이기 10)
글번호 : 793    조회 : 198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2-21 15:37:01   
 
2019년 2월 17일 /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0

강제하는 법? 자유하게 하는 법?
신명기 30:19 갈라디아 5:1

곽건용 목사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9).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디아 5:1).

강제당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오늘 설교는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설교 열 번째이고 네 번째 소주제 ‘강제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 첫 번째 설교가 되겠습니다. 이 소주제는 이제껏 다뤄온 소주제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걸로 예상됩니다. 물론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 삶에서 이를 실현하고 실천하는 것은 다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은 ‘은유적’이고 ‘직관적’입니다.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죽지 않고 1백 년, 2백 년 산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때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죽음의 하느님이라는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생명을 생각하고 말할 때 우리는 동시에 죽음을 생각하게 마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동시에 죽음의 하느님, 또는 죽임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강제하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자유하게 하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느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제하는 하느님이나 자유하게 하는 하느님이란 말 역시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대립되는 두 가지 개념을 갖고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말하려는 시도인 겁니다.

사전은 ‘강제’를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 권력이나 위력의 차이가 있는 현실이 전제되어 있고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사를 갖고 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강제당하는 걸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요?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또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남에게 뭔가를 강제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강제당하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어른에게 “쪼끄만 게 까불어.” 한 마디로 제압당해도 그러려니, 그래야 하는가 보다 하며 참고 살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사람은 강제당하는 것에 저항합니다. 요즘은 웬만하면 “쪼끄만 게 까불어.”가 통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이렇게 윽박지르면 대꾸하거나 대들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강제당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강제로 할래, 자유롭게 할래 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모두 자유롭게 하겠다고 대답할 겁니다.

종교는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영역

그런데 이상하게 강제가 잘 먹히는 데가 ‘종교’의 영역입니다. 물론 종교에서는 ‘강제’란 말을 쓰지 않고 대신 ‘복종’ 또는 ‘순종’이란 말을 쓰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강제와 복종 또는 순종은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복종은 대부분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제를 받아들여서 자가 의사에 반해서 원치 않는 것을 하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종교의 영역에서는 복종 또는 순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고 심지어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분명 이런 점은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맞지 않지만 많은 종교에서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람이 자기 의사를 거슬러서까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건 왜 그럴까 생각해봤습니다. 강제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는데 말입니다. 첫째는 내게 복종을 강요하는 존재가 갖고 있는 힘/권력 때문입니다. 그 힘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원치는 않지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둘째는 복종을 강제하는 힘에 어떤 면으로든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첫째 이유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뭐든 강제하는 쪽에 의존하는 바가 있다면 굳이 힘으로 강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복종하게 됩니다. ‘스스로’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 경우도 엄밀하게 말하면 자발적인 복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자신의 뜻을 강제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만드는 하느님, 이것은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설교와 교회교육을 통해서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주입받아왔고 이런 모습은 많은 기독교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사람에게 강제당하는 걸 싫어하고 거기 저항하는 사람도 하느님만은 뭔가를 강제로 해도 괜찮고 하느님에게만은 복종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이니까 강제해도 되고 하느님이 하면 강제에 대한 복종도 미덕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배운 하느님은 뭔가를 못 하게 하는 분이고 금지하는 분이며 사람이 일정한 선을 넘으면 즉각 이를 저지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은 명령하는 하느님이고 강제하는 하느님이며 법을 제정해 놓고 그걸 어기면 징벌하는 무서운 하느님이었습니다. 공포와 징벌의 하느님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주입된 하느님의 모습으로 인해 복종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사람이 곧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게 물어왔습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용인해왔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왔던 겁니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유럽에서 펼쳐져왔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말할 때 유럽 중심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듯 하느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강조해온 교회가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지식인들에 의한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그 이후 근대 유럽의 역사는 하느님의 권위를 앞세운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이성이 벌인 해방투쟁의 역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적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교회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이때 이들은 교회권력은 하느님을 사람들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분으로 만들어놓고 그 뒤에서 온갖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근대 이후 유럽의 역사는 교회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새롭게 그림으로써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새로운 종교를 일으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할 계획입니다.

강제하는 하느님과 원죄를 저지른 인간

왜 이렇게 됐을까요? 왜 교회는 하느님을 자신의 뜻을 강제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만드는 분으로, 늘 뭔가를 못하게 하고 금지하는 분으로, 사람이 일정한 선을 넘으면 즉각 저지하는 분으로 그렸을까요? 이 역시 하느님에 대한 ‘은유’임에 분명한데 왜 하필 교회는 그 긴 세월동안 하느님을 다른 모습이 아닌 이런 모습으로 그렸을까 말입니다. 또한 많은 교회들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사정의 밑바닥에 ‘원죄’ 교리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죄 교리, 곧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이 절대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고 그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마치 유전인자처럼 유전되어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에서 자유롭지 않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인류를 여기서 해방시켜 줄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그 분을 믿어야 원죄의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바로 원죄 교리입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태어나면서부터, 그러니까 특정한 의지를 갖고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정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부과하는 강제도 감수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왔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죄라고 하는 결정적인 결격사유를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원죄 교리의 효시는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첨에 이 주장을 했을 때는 아마도 자기의 주장이 이렇듯 엄청난 무게를 갖는 교리가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그가 이 교리를 주장한 것은 유아세례를 주는 게 옳으냐. 그르냐의 논쟁에서였습니다. 아직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선악을 행할 수 없는 유아가 어떤 이유로든 죽었다면 그를 죄에서 해방시켜줄 세례를 행해야 하는지 여부는 다투는 와중에 어거스틴이 이런 주장을 했던 겁니다. 유대교는 처음부터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도 지금은 과거에 비하면 이 교리의 중요성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프란시스코 교황 이후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른 모습의 하느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신교도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보다는 강제를 용인하고 복종 또는 순종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많이 약해졌지만 많은 교회에서 여전히 복종이 강조되는 형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아직도 규범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유일한, 또는 지배적인 하느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절대 권력을 소유하고 강제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군주 같은 하느님, 명령하고 질서를 세우고 다스리고 판결을 내리고 강제하고 억압하고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이 여전히 지배적입니다.

이와 같은 억압적인 하느님의 모습은 쉽게 인간을 죄책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나친 죄책감입니다. 하느님의 용서하는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죄책감, 이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물론 죄를 저질러 놓고,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사람에게 실질적인 고통과 피해를 줘놓고 쉽게 하느님의 용서를 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마치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강제로 복종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모습을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여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도 합니다. 정신분석학은 사람이 앓는 정신질환에는 종교적 요인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입니까? 다른 길은 없을까요? 강제로 복종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모습 말고 다른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는 강제하는 하느님이라는 은유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까요? 질문은 바꿔보겠습니다. 과연 하느님 자신은 당신을 강제로 복종하게 만드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원하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느님을 강제로 복종하게 만드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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