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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3월 17일 "유일신 안에 잠재된 폭력성?" (가짜 하느님 죽이기 15)
글번호 : 796    조회 : 35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3-27 08:38:26   
 
두 주일 전(3/17)에 한 설교문이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열네 번째이자 '폭력의 하느님에서 평화의 하느님으로' 소주제 첫 번째 설교입니다. 이 긴 시리즈 설교는 그 다음 소주제 '홀로 있는 하느님에서 함께 있는 하느님으로' 소주제를 다루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은 얘기를 제법 많이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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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7일 / 사순절/저항절 둘째 주일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4

유일신 안에 잠재된 폭력성
출애굽기 20:1-6

곽건용 목사

1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2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5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죗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굽기 20:1-1).

사람들끼리의 다툼에 절대자는 누구 편?

오늘 설교는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열네 번째이고 ‘폭력의 하느님에서 평화의 하느님으로’ 소주제 첫 번째입니다. 이 소주제는 다음 주일까지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소주제 ‘홀로 있는 하느님에서 함께 있는 하느님으로’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이 길고긴 여정도 이젠 종착점이 보입니다.

1992년 또는 1993년쯤에 <말>지에서 읽은 리영희 교수의 글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말>지는 요즘 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엄혹했던 군사독재시절에 활발하게 언론자유운동을 벌였던 잡지로서 이른바 ‘보도지침’을 세상에 알려서 고초를 겪기도 한 잡지입니다. 리 교수님의 글은 그분이 한국전쟁 중에 국군 통역장교로 근무했을 때 겪은 일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리 교수는 국군 병사들이 인민군과 전투하러 나가기 전에 군목이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했답니다. 당시 이분 생각에 한국전쟁은 같은 겨레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벌인 죽고 죽이는 전쟁인데 도대체 하느님은 이렇듯 사람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서 벌이는 전쟁에 어느 편을 들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이념이니 민족이니 하며 편 갈라서 전쟁을 벌이는데 절대자요 초월자인 하느님이 어느 한 편을 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리 교수께서 글을 얼마나 잘 쓰십니까. 저는 그 글을 복사해서 당시 교회에서 발행하던 잡지에 전문을 실었고 교우들 간에 이 글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지요. 이 분은 감옥에 있을 때 성경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감옥에 들일 수 있는 책이 무척 한정되어 있어서, 그러니까 역사나 이념, 사상에 관한 책은 들일 수 없어서 양심수들이 종교의 경전들을 많이 읽기도 했습니다. 리 교수께서도 그래서 기독교와 불교 경전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사상과 행동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지만 이분은 평생 어느 종교도 갖지 않고 비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이분이 예수님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던 데는 한국전쟁 때의 경험이 영향을 줬을 거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폭력을 용인하고 때론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하느님,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에 대한 얘기는 여러분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폭력과 전쟁의 하느님이고 신약성서의 하느님, 예수님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므로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구약성서 시대뿐 아니라 21세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신의 이름으로 살인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뉴질랜드의 한 회교 사원에서 테러사건이 벌어져서 마흔아홉 명이나 죽었습니다. 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원인과 이유가 밝혀지겠지만 이 테러도 종교에 기반을 둔 증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러니까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종교 관련 테러하고 해도 놀랄 사람이 많지 않을 거란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하도 자주 벌어지니까 말입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이런 일이 정말 종교 때문에 벌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종교는 그저 표면적인 이유일 따름이고 사실은 종교라는 가면 뒤에 다른 원인이 있는 걸까요? 종교가 범인입니까, 아니면 종교 배후에 다른 세력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저는 성경에 등장하는 폭력, 특히 전쟁과 대량학살이란 주제에 나름 ‘전문가’입니다. 몇 년 전에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에 대해서 여러 주에 걸쳐서 설교한 적도 있거니와 이 주제로 책을 쓸 생각으로 연구도 많이 했습니다. 언젠가는 이 주제로 꼭 책을 쓸 겁니다. 그런데 마침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가 이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했던 설교와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시 한 번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는 것은 모두 진짜 하느님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번 시리즈에서 여러 번 얘기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라고 수차례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들은 시각장애자가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극히 작은 부분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게 하느님의 전부인 양 말한다는 겁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말은 대개는 매우 주관적인데 그걸 객관적인 듯 얘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얘기할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원칙이라면 원칙일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는 하느님에 대한 모든 얘기는 첫째는 부분적이고 둘째는 주관적이며 셋째는 은유적이란 사실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 얘기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또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그것이 뭣이 됐든 모종의 목적을 이루려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남들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인간사에 미주알고주알 꼬치꼬치 참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일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하느님이 인간사에 꼬치꼬치 참견하고 당신을 이용해 먹지 못하게 하셨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런 시리즈 두 번째 소주제인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에서 지켜보는 하느님으로’에서 얘기했듯이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중동 어느 한 곳에서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묻지 마 테러’를 벌이기 위해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 미국 워싱턴 DC의 하얀 집에서는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사는 중동의 한 도시를 폭격할 계획이 성공하게 해달라고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일은 과거에도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벌어질 겁니다. 물론 이들이 부르는 신의 이름은 다를 수 있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들이 벌인 폭력의 책임을 제삼자에게 돌리고 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합니다. 문제가 되는 갈등과 그로 인한 폭력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는데 이런 희생양은 대개는 그 집단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돌ㅣ켜보면 유대인들과 집시들이 그랬고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가 그랬으며 소수종교인들이 또 그렇게 희생양이 되어 희생당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다신교와 일신교

흔히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과 대량살상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곧 유대교, 기독교, 회교에 의해 자행됐다고 말합니다. 굳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이름을 들지 않더라도 종교학자들 중에도 유일신 종교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에 비해 다수의 신의 존재를 믿는 다신교는 서로 싸우지도 않고 평화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신을 믿는 일신교는 전투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 점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다신교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의 갈래는 특정집단의 수호신들입니다. 고대세계에는 특정집단이나 특정지역 사람들을 지켜주고 그들의 복지를 보장해준다고 믿어진 수호신들이 있었습니다. 니느웨에는 니느웨의 수호신이 있고 여리고에는 여리고의 수호신이 있으며 바빌론에는 바빌론의 수호신이 각각 있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이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을 때는 각각의 수호신이 그 집단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집단은 자기들이 믿던 신을 버리고 승리한 집단의 신을 믿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자기들이 믿던 신의 무능력이 입증됐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다신교에는 폭력과 전쟁이 없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갈래의 다신교는 평화로웠다고 볼 수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신교는 평화적이라고 여겨질까요? 그것은 다신교에는 또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다신교에 각각의 신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고대인들은 비를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고 곡물의 성장을 관장하는 신, 후손을 이어주는 신 등이 각각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 각각의 신이 주관하는 영역이 겹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일이 없었고 따라서 조화가 강조됐던 겁니다. 그래서 다신교가 평화롭다고 여겨지는 겁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다신교에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신들뿐 아니라 각각의 집단을 지켜주는 수호신 개념도 있으므로 그것을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일신교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 최초의 일신교는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파라오 아케나톤 시대에 태양신 아텐을 유일신으로 믿었던 종교입니다. 하지만 아케나톤의 일신교는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아케나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고 후손에 의해 이집트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졌습니다. 그 후에는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모세를 통해 소개되어 믿어지기 시작한 야훼종교, 곧 구약성서의 종교입니다.

일신교 탄생의 의미

그럼 다신교와 일신교는 뭐가 다를까요? 단순히 다신교는 신의 숫자가 여럿인데 반해서 일신교에는 신이 하나라는 게 다릅니까? 물론 맞는 말입니다. 다신교는 신이 여럿 있다고 믿고 일신교는 신이 하나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이 차이가 뭘 뜻하느냐 하는 겁니다. 신의 숫자가 다수에서 하나가 된 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일신교의 신은 다신교에서 다수의 신이 갖고 있던 기능을 홀로 행한다고 믿어집니다. 하나의 신이 비도 오게 하고 자식도 낳게 해준다는 겁니다. 이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다양한 집단이 하나의 같은 신을 믿는다면 서로 전쟁을 벌일 때 그 신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일신교에서 부각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뿐인 신이 그 신을 믿는 사람들끼리 싸울 때 어느 편을 드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다신교에는 없다가 일신교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부각된 것이 신에 대한 사람의 생각에 ‘옳고 그름’이란 개념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에 대해 옳은 생각과 잘못된 생각이 생겨났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서 나중에는 진짜 신이 있고 가짜 신이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이 ‘진짜’는 아니란 겁니다. 그 중에는 ‘가짜’도 있다는 거죠. 신이라고 해서 다 진짜는 아닙니다. 따라서 다 옳지는 않습니다. 진짜 신은 옳지만 가짜 신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어느 신이 진짜이고 어느 신이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인지 가려내야 했습니다. 진짜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와 가짜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를 구별해야 하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진짜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는 옳고 정의롭고 가짜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는 틀렸고 정의롭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신교가 지배적인 신관이던 시대에 일신교가 생겨난 것은 진짜 신과 가짜 신을 구별하게 된 결과였다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의 숫자가 다수에서 하나로 줄어든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일신교를 믿게 된 사람들은, 그러니까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은 자기들을 지배했던 이집트와 파라오의 신들을 가짜라고 규정하고 야훼만 진짜 신이라고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히브리인들은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까요?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믿게 됐을까요? 저는 이들의 야훼 일신교가 당시의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한 첫 종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는 최초의 종교가 야훼 일신교였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는 지배자가 믿고 떠받드는 종교를 피지배자도 믿고 떠받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이 믿는 신이 지배자들을 넉넉하게 축복해서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누리기 원했습니다. 그것 밖에는 자기들이 생존할 길이 없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과정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자신만이 유일한 진짜 신이라고 주장하는 야훼라는 신이 노예들의 신임을 자처하면서 히브리 노예들에게 소개됐습니다.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야훼 신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해방을 약속했고 그걸 실현했습니다.

제가 과문해서 그런지 인류 역사 최초의 일신교인 야훼 종교에 담겨 있는 이와 같은 의미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많이 않아 보입니다. 저는 일신교의 탄생은 이런 사정,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던 당시 사회상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학자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일신교의 탄생, 특히 야훼 종교라는 일신교의 탄생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실은 이런 야훼 하느님의 폭력성입니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야훼 하느님은 전쟁신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수많은 전쟁을 벌입니다. 때로는 이스라엘 군인들은 가만히 있고 스스로 적을 몰살하기도 하고 또 이스라엘더러 전쟁 상대자의 군인뿐 아니나 여자와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몰살하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폭력적인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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