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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5월 19일 "감금된 채 살 건가, 탈주할 건가?"
글번호 : 803    조회 : 113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5-20 12:55:35   
 
2019년 5월 19일 / 부활절 후 넷째 주일

감금된 채 살 건가, 탈주할 건가?
누가 1:34-38

곽건용 목사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36 보시오,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누가 1:34-38).

하갈이 탈주를 감행하다!

지난주일은 어머니날이었는데 저는 어머니날이나 아버지날 같은 것들이 이제는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걸 제정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굳이 과거와 같은 의미로 그런 날들을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족도 변했고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가족 간에 사랑하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변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서의 인물 중에서 그 동안 별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하갈이란 여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하갈은 이스라엘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이집트인 몸종으로서 불임인 사라의 명령에 따라 씨받이가 되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몸종에서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아들은 낳은 어머니로 신분상승을 이룬 겁니다. 하지만 훗날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은 사라에 의해 그녀는 쫓겨나서 빈들에서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두 여인 사이의 갈등에서 편파적으로 사라의 편을 들었던 야훼 하느님이 보낸 천사에 의해 구조되어 훗날 큰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습니다. 그 당시 몸종의 은퇴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은퇴나이라는 게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 집안의 씨받이가 되지 않았더라면 몸종으로 살다가 은퇴한 다음에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그녀가 모시던 마님이 불임이었기에, 그녀가 하갈을 아브라함의 방에 집어넣어 아기를 갖게 했기에 그녀의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성서는 그녀가 아기를 갖게 되자 주인마님 사라를 업신여겼다고 했는데,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저는 과연 그랬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주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도 몸종 주제에 주인마님을 업신여기는 게 가능한가,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철저한 가부장사회에서 후사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하갈이 그 일을 해냈으니 집안에서 지위가 매우 상승하긴 했을 겁니다. 그러니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갈이 아니었더라면 대가 끊어질 뻔했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두 번 가출을 감행했는데 첫 번째는 스스로 한 가출이었고 두 번째는 아브라함과 공모한 사라에 의해 강제로 내쫓긴 경우였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첫 번째 가출입니다. 하갈은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여긴 사라에게 학대를 당하자 임신한 몸을 이끌고 주인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이런 행위는 당시 상황에서 비추어보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했을까요? 사라가 한 짓을 잘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보면 대단히 악하게 행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를 이을 아기를 가졌다고 몸종이던 자가 주인인 자기를 업신여기는데 잠자코 있겠습니까. 만일 하갈이 사라의 명령에 복종하고 고분고분했다면 그 집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재산을 어느 정도 상속받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큰 부자였습니까. 그러니 그의 재산 중 일부만 상속을 받았어도 떵떵거리며 살 정도는 됐겠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안정된 삶을 버리고 가출했습니다. 무엇이 하갈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요? 왜 그녀는 목숨을 건 모험을 했을까요?

마리아도 탈주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도 경우는 달라도 비슷한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녀는 요셉이란 청년과 정혼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는데 하루는 하느님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서 그녀가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아기는 자라서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할 거라고 알려줍니다. 이에 그녀는 자기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고 말하지만 천사는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계획 하에 일어날 것이라면서 그녀의 친척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임신한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자기는 주님의 여종이니 천사의 말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적적인 동정녀 수태에는 관심을 많이 갖고 있고 그에 대해 논란도 있지만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후에 겪었음직한 일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천사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면 자기와 자기 가족과 약혼자 요셉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마리아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가족들은 미혼모와 그 가족이라는 사회적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고 요셉이 파혼할 것이란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 일은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들만 파멸시키는 게 아니라 요셉과 그의 가족들에게도 치욕을 안겨주는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일이라는 천사의 말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녀에게 가족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였을까요?

하갈과 마리아가 살았던 시대는 서로 달랐지만 어떤 면에서 두 사람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비슷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참고 지냈다면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은 둘째 부인으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미혼모가 되라는 천사의 말을 거부하고 그 시대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만족했다면 최소한 평범한 삶을 살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갈은 집을 뛰쳐나왔고 마리아는 가정에 머물렀지만 사회로부터 온갖 멸시와 비난을 받으며 예수님을 낳아서 키웠습니다. 하갈은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났고 마리아는 가족 안에 머물렀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일종의 ‘탈주’를 감행했던 겁니다.

죽은 아버지를 불러내지 마!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길버트 가족이 처한 힘든 상황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됐습니다. 오랫동안 가출했다 돌아온 아버지는 집 지하실에서 목매달아 자살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온 가족을 떠받치던 기둥이 무너지고 기초가 허물어진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가출한 형의 짐까지 짊어져야 했던 길버트에게도 이 사건은 큰 부담이었지만 다른 식구들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재와 죽음이 상기되는 걸 두려워하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합니다. 하루는 길버트가 여동생 엘렌에게 음식을 먹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하자 엘렌은 장난처럼 “알았어요, 아빠. 안 그렇게요, 아빠.”라고 말하지요. 길버트는 엘렌의 오빠였는데 그녀가 장난처럼 오빠를 아빠라고 부른 겁니다. 에이미가 엘렌에게 그만두라고 하고 길버트는 심드렁하게 “아빠는 죽었어.”(Dad is dead)라고 말하자 어니가 형을 따라서 “아빠는 죽었어.”라고 반복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아빠는 죽었어. 아빠는 죽었어.”라고 말이죠. 그러자 어머니는 식탁을 두드리면서, 무거운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르면서 “그만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듯 길버트 가족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고 그걸 말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이 장면은 길버트가 금기를 어기자 온 집안은 혼돈에 빠지는 걸 보여줍니다. 그만큼 집안의 기초요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가족들은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아버지는 매우 나약한 인물로 표현됩니다. 영화는 왜 그가 가출을 했는지, 왜 자기 집 지하실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그가 매우 나약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영화는 그가 지은 집이 매우 허약하고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길버트의 집은 수리할 데가 많은 집입니다. 기초공사에 문제가 있으며 현관도 약간 기울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5백 파운드나 되는 어머니 때문인지 바닥이 주저앉았습니다. 길버트의 친구 터커가 지하실에 임시로 기둥 몇 개로 받쳐놓아야 할 정도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지은 집을 아버지에 대한 은유로 읽었습니다. 따라서 그 집의 허약함은 곧 아버지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은유가 되겠습니다.

길버트는 아버지를 “웃음도 표정도 없었고 살아 있을 때도 이미 이 세상 분 같지 않았다.”고 표현하지요. 이런 아버지지만 그의 부재는 온 식구에게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안의 중심이 됐어야 하는 인물은 어머니입니다. 영화에서는 식구 중 누구도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 사후 7년 동안 자신을 고립시켜서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점을 고여 있는 물 같은 정착의 공간으로서의 가족을 그리는 은유로 읽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가족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니가 경찰서에 잡혀가자 그녀는 7년 만에 외출을 감행하지요. 결국 아들을 데려오면서 그녀는 어니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한 말이 “다시는 사라지지 마라!”(Don’t disappear!)였습니다. 남편과 큰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가족 중 누구라도 자기를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어니가 잠자리에 들면서 길버트에게 “굿바이.”라고 인사하자 길버트는 “굿바이가 아니라 굿나잇이지.”라고 정정해주지만 어니는 계속해서 “우리는 아무 데로 가지 않아, 굿바이.”(We will not going anywhere, Good-bye.”라고 고집스럽게 말합니다. 길버트의 집에서는 굿바이조차 금기인 겁니다.

베키가 죄다 뒤흔들어놓았다!

이런 길버트와 그의 가족에게 RV를 타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베키가 등장합니다. 길버트에게 뭘 하고 싶으냐고 베키가 묻자 그는 ‘좋은 사람’(a good person)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는 얘기는 지난 주일에 했습니다. 베키는 여러 모양으로 길버트가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할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하루는 베키가 사마귀를 보고 길버트에게 이렇게 말하죠. “사마귀네. 수컷이 암컷 위로 잽싸게 올라가면 암컷은 수컷의 머리를 덥석 문데. 그렇게 교미를 하다가 끝나면 암컷이 수컷을 먹어버린데.” 무엇을 은유한 걸까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렇게 먹어버렸다는 얘기일까요. 아니면 길버트를 그렇게 먹어버릴 거라는 얘기일까요? 아버지와 길버트는 동일한 운명이 빠질 거란 뜻일까요? 길버트가 일하는 잡화점 주인이 동네에 큰 마켓이 들어서므로 장사가 안 될 거라고 걱정하자 길버트는 고객이 일시적으로는 고객이 그리로 몰리겠지만 결국은 오래지않아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꼭 네 아버지 같구나.”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 그대로 있으면 길버트는 자기 아버지가 간 길을 가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사람 같지 않고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그냥 계셨던 분’이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모든 욕망이 거세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억압한 채 의무라는 감옥에 갇혀서 살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자 홀연히 사라졌었고 다시 돌아왔지만 달라진 게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집을 떠나지 못해서 집에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엄마와 길버트는 모두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보입니다. 서로 다른 모양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엄마는 가족들이 자기를 떠나는 게 두려워서 마구 살을 찌웠을 수도 있겠습니다. 길버트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던 베티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길버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널 택했어. 나는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어. 왜냐하면 너는 항상 내 곁에 있어줄 것 같아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녀가 길버트를 택한 까닭도 그가 자기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정작 엔도라를 떠나는 사람은 길버트가 아닌 베티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마을을 떠납니다. 정착과 떠남을 대립해서 보여주는 의도적인 장치입니다.

이런 상황은 베키 덕분에 달라집니다. 베키는 길버트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길버트에게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하는, 오랫동안 길버트가 억압해왔던 질문을 던집니다. 비록 그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란 모호한 말로 답을 회피하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역설적인 모양이지만 길버트 어머니도 자폐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길버트는 몇 번이나 사정한 끝에 기어코 베키를 엄마와 만나게 합니다.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엄마의 침실, 엄마 자신도 긴 세월 동안 들어가지 않았던 침실에서 둘은 만났고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어요.” 이게 엄마가 베키에게 한 말입니다. 베키도 “저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대답하지요.

남의 욕망을 욕망하지 말라!

이들은 ‘처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본래의 모습은 이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엄마는 스스로를 가두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베키에게 말했고 베키는 자기가 처음부터 이렇게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 듯합니다. 그녀는 베키에게서 7년 만에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도 저렇게 예뻤을 때가 있는데, 자기도 저렇게 자유로웠던 때가 있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녀는 본래의 자기 모습이 이렇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 후 곧 그녀는 죽습니다. 자기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숨을 거둡니다. 그게 그녀가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었을 겁니다.

어니는 형에게 얻어맞은 후에 엄마가 아닌 베키에게 달려갑니다. 늘 엄마에게 갔던, 그리고 엄마의 말을 되풀이하던 어니가 이번에는 엄마 아닌 베키에게 달려간 겁니다. 베키는 어니에게 엄마처럼 ‘다시는 이러지 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는 어니의 상처를 닦아주고 치료해준 다음에 “우리 산책 갈까? 놀러 갈까?”라고 말했고 그를 호수로 데려가서 스스로 물에 들어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욕조에서 하룻밤을 지낸 사건 후로 목욕도 거부하던 그에게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노래도 불러주면서 베키는 그가 물속에 들어가게 합니다. 심지어 정신장애자인 어니에게도 엄마의 앵무새가 되는 것이나 선샤인 역할을 하는 것은 힘에 겨웠던 모양입니다. 자기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베키가,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면서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베키 같은 존재가 어니에게도 필요했던 겁니다.

타인의 욕망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한 절대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은 나의 삶이 아니고 나의 삶이 아닌 이상 그 삶은 살아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기의 욕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강요하기 가장 쉬운 관계입니다. 우리는 가족에게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남의 욕망을 주입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가족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모두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착과 안정이라는 가치를 가족에게서 얻는다고 믿기 때문에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가도 반복해서 가족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 안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현대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이데올로기 같은 것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한 가족의 가장이 자살하거나 고무풀장에 코를 박고 죽는 걸로 그림으로써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과연 옳은지 묻고 있습니다. 길버트가 베티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은 이와 같은 숨 막히는 가족 안에서 숨 쉴 곳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일탈이요 탈주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위는 또 다른 굴레를 뒤집어쓰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굴레에서 해방 되는 길은 타인의 욕망을 떨어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욕망이 곧 자기의 욕망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욕망을 그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구약성서에 대해 잠시 얘기하겠습니다. 구약성서는 정말로 문제가 많은 책입니다. 그 책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윤리관 등등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선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가 좋습니다. 백만 가지 나쁜 점이 있는지 잘 알지만 제 머리를 치게 만드는 몇 가지 점 때문에 구약성서가 갖고 있는 매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출애굽 때 히브리 노예들이 겪었던 일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으로 모세에 의해 소개된 신의 도움으로 그 거사를 이루어냈습니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들 신나서 이집트에서 나왔겠지요. 하지만 이들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동안 그들에게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떨어지자 이들은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에게 자기들이 이집트에 있었을 때는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었는데 왜 자기들을 끌고 나와서 배를 곯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탈주에 정해진 때는 없다!

저는 그 동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어디 있냐면서 이들을 욕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들을 배불리 먹인 노예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노예 주인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런 거짓말을 해가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놨을까요? 저는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이 말은 물론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 이들의 최고 욕망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했을 때 이들의 최고 욕망은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배불리 먹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유랑하면서 이들은 그 욕망을 남의 욕망으로 갈아치워 버렸습니다. 이 얘기에서 고기 가마는 타자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이들이 이루려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베키는 떠돌아다닙니다. 베키 할머니도 그녀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말합니다. “나는 평생을 한곳에서만 살았지. 하지만 지금은 안 그래. 베키 덕분에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된 거야.” 그녀도 평생 한 곳에서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비록 늙었지만 손녀와 함께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늘그막에 ‘탈주’를 감행했던 겁니다, 이는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베키와 길버트가 석양 무렵에 끝없는 하늘 아래, 드넓은 대지 위에 길버트의 집이 조그맣게 서 있는 걸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길버트는 “집안에 들어가면 꽉 찬 느낌인데 여기서 보니 저렇게 초라하다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좁은 공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안에서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서 보니 그 공간이 그렇게 좁고 초라한 걸 알게 된 겁니다.

베키가 떠날 때가 되자 길버트에게 “내가 안 떠났으면 좋겠어?”라고 묻습니다. 길버트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아니. 가고 싶으면 가야지.” 왜 그가 베키를 잡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길버트가 탈주하는 자유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후이므로 그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녀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녀를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다음 해에 어니와 함께 베키네 RV에 올라타고 엔도라는 떠납니다. 일찍이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베티도 그 마을을 떠났지만 두 사람이 떠난 의미와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흔히 탈주가 빈자리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누군가 떠나면 그 자리가 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아버지와 형의 가출과 죽음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모든 탈주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는 탈주가 아니라 주어진 것 자체를 바꾸는 탈주도 있지 않겠습니까. 틀을 바꾸어버리는 탈주, 프레임을 변형하는 탈주, 그것이 부른 배를 안고 하갈이 감행했던 탈주였고 미혼모라는 손가락질을 감수하고 마리아가 저지른 탈주였으며, 베키와 할머니, 그리고 길버트와 어니가 해한 탈주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니는 길버트에게 “우리는 안 떠나?”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길버트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원한다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We can go anywhere if you want). 그러자 어니는 멀리서 오는 RV 행렬을 바라보고 그리로 달려가며 신나게 소리친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구! We can go anywhere! We can go anywhere!

다음 주일부터 두 주간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갖고 얘기하겠습니다. 최근에 나온 속편 말고 1982년에 나온 오리지널 영화를 말하는 것이니 잊지 말고 꼭 한 번 이상 보고 오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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