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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5월 26일 "그것마저 따 먹으면 안 돼!?" 1
글번호 : 804    조회 : 31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6-05 09:30:15   
 
2019년 5월 26일 / 부활절 후 다섯째 주일

그것마저 따 먹으면 안 돼!?
창세기 3:1-7, 22-24

곽건용 목사

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4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22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24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기 3:1-7, 22-24).

‘진화’를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종교는 길고긴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활동이라는 얘기를 저는 여러 번 했습니다. 물론 종교 그 자체도 계속 진화했습니다. 진화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종교에도 오래 전에 갖고 있던 흔적들이 지금껏 남아 있기도 합니다. 사람의 신체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지금을 쓸모가 없어졌는데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는 것 말입니다. 이처럼 현재 고등종교에도 원시적인 신앙내용과 전통과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현대 무신론자들은 그와 같은 점들을 지적하면서 종교는 진작 없어졌어야 할 원시적이고 미개한 인류의 유산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나 진리,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가치 등을 추구하는 종교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존재할 것입니다. 물론 그 내용과 형식은 계속해서 진화하겠지만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진화’란 말 자체가 금기어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란 말과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옳은 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은 학설이므로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옳다고 인정하든지 말든지 할 일이지, 믿거니 믿지 않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의 문제는 이와 다릅니다. 저는 진화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둘을 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창조론’은 믿지 않습니다. ‘창조론’이 하느님의 창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아직까지 저를 설득한 창조론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믿음의 내용이지만 창조론은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론은 창조를 ‘설명’하고 납득하기 위한 이론이므로 그 설명이 논리적이고 사람을 납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창조론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언어로 구성되었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창조론은 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고전적인 창조론도 그렇고 지적설계론도 마찬가지이고 유신론적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하느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설명이 되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창조를 믿고 안 믿고는 그 사람의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저는 창조가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논리적으로 설명되었다고 믿는 게 아닙니다. 제게 하느님의 창조는 과학이 아니라 존재와 가치에 관한 믿음입니다. 저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기로 ‘선택’했고 그런 믿음을 갖고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누구든 그게 믿어지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 누구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걸 어떻게 억지로 믿겠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종교 얘기를 하다가 얘기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절대자 또는 진리를 추구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최고의 정신활동인 종교는 동시에 ‘그런 질문을 하는 너는 누구냐?’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사람에게 던져왔습니다. 내가 누군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됨이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왔습니다. 한 유대교 문하생이 자기 랍비에게 와서 “스승님, 제가 탈무드를 1백 번 읽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스승이 “그럼 탈무드는 너를 몇 번이나 읽더냐?”고 되물었다는 얘기는 종교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읽었습니까? 성경은 여러분을 얼마나 읽던가요?

오늘과 다음 주일에 우리가 물을 질문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이 얘기를 할 작정을 하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떠오른 성서구절이 창세기 3장이고 뇌리를 때린 영화가 <블레이드 러너>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이것을 갖고 얘기해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선악과 얘기는 성서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구절입니다.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대부분이 이 얘기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대로 안다기보다는 대충만 아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말 제대로 아는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개봉됐을 때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흥행에도 실패했습니다. 이 영화가 기대를 모았던 까닭은 감독이 1979년에 개봉된 <에일리언>으로 각광을 받았던 리들리 스캇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일반 관객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도 냉정하게 비판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 거의 동시에 개봉하는 바람에 흥행에도 참패했지요. 그렇게 10년 동안 묵혀 있다가 1992년에 감독판(director’s cut)이 나오면서 완전히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름도 붙여졌지요.

저는 영화의 기본적인 모티브는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얘기라고 확신합니다. 영화의 원작 ‘안드로이드들은 전기 양을 꿈꾸는가?’의 작가 필립 K. 딕이나 스캇 감독이 의식적으로 선악과 얘기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얘기 모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성서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성서가 반영하고 표현한 것이지 성서가 만들어낸 질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서와 영화는 모두 질문에 분명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지, 확고한 대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기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모두가 인정할 답이란 것이 존재하기나 하겠냐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서가 답을 주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라고 싸우자고 덤빌 사람은 여러분 중에 없겠지요. 성서는 답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책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스스로 찾기를 바라는 책입니다.

그걸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인간 창조와 선악과 얘기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고 그를 에덴에 두셨습니다. 거기 온갖 열매를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는데 그 중에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고 자라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동산을 돌보게 하시면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좋은데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그걸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금지된 나무열매는 선악과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먹어도 됐습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생명나무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는 나무였든가 본데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가 아니라 그걸 먹었더라면 영원히 죽지 않았을 겁니다. 요즘 금요 독서모임에서 읽고 있는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제는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허황된 꿈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120살이나 150살까지 사는 게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 옛날에 첫 사람들이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과를 먹었더라면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까요?

첫 사람들은 생명과 아닌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에덴에서 쫓겨났고 죽음을 맛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성서는 여자의 창조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게 좋지 않아서 하느님은 그에게 짝을 주기로 했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온갖 동물들을 아담 앞으로 이끌고 오셔서 아담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그 짐승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랍니다. 그런데 짐승들 중에는 아담에게 어울리는 짝이 없다고 했지요. 엄청나게 엽기적인 얘기 아닙니까. 하마터면 사람이 코끼리든 기린이든 그 어떤 동물과 짝지어 살 뻔 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깊게 잠들게 한 후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서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라며 탄성을 올렸다지요. 이 얘기를 보면 아담의 특기는 이름 붙이는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와에게 뱀이 나타나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신학자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뱀을 가리켜 ‘최초의 신학자’라고 불러왔습니다. 뱀이 하와와 함께 일종의 신학토론을 벌였으니 말입니다. 뱀은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비틀어서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제외하고 모든 열매를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셨지요.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는 것이 문제를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만 하라 했는데 ‘열’을 하면 열배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착각입니다.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 운운하는 뱀에게 똑같이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느님이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대체 이 ‘만지지 말라’는 금령은 어디서 왔을까요? 저는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십계명 중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유대인들이 과잉해석해서 아예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은 끝에 그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 이름을 ‘야훼’니 ‘야웨’니 ‘여호와’니 ‘제호바’니 하고 부르지만 사실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모릅니다. ‘과장’의 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뱀은 이런 하와의 태도에서 허점을 본 모양입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왜곡합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느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뱀이 옳았을까?

뱀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란 겁니다. 첫째 주장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먹는 그 날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뱀은 과감하게 그 말을 뒤집습니다. 그걸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확언한 겁니다. 죽을지 죽지 않을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아직 벌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벌어지지 않은 일을 판단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말을 누가 했느냐를 근거로 할 때가 많습니다. 이 경우처럼 말의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게 불가능할 때는 누가 그 말을 했느냐를 따진다는 겁니다. 하와가 직면한 경우는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아무래도 뱀보다는 하느님이 더 신뢰가 가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둘이 비슷한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와는 생각하는 대신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봤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더란 겁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는데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건 어떤 건지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그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봤고 그걸 따먹었고 자기만 먹기 미안했던지 아담에게도 줘서 그도 먹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하와에게 선악과를 받아 덥석 먹은 아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작 선악과 금지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 명령을 받았을 때 하와는 창조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금지명령을 직접 받았던 아담이 어떻게 하와가 준 선악과를 덥석 받아먹었는가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얘기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자기들이 벌거벗은 걸 알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린 얘기가 나오고 하느님이 뱀과 하와와 아담을 징벌한 얘기가 나온 다음에 오늘 읽은 22절이 이어집니다. 하느님이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 다음에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우리’가 누군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데 오늘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하느님처럼’ 됐다는 얘기와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는다면 끝없이 살게 될 테니 그걸 막기 위해서 하느님은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고 혹시나 해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불칼을 휘두르는 거룹을 시켜서 막아두었다는 얘기에 더 관심이 쏠립니다.

이제 보니 뱀이 옳았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말이 하느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우리처럼’ 됐다고 말입니다. 이제 생명과까지 따먹으면 더 하느님처럼 될 테니 그걸 막아야겠다는 겁니다.

만일 인간이 창조주라면?

저는 앞에서 영화가 창세기 3장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는데 주의 깊게 영화를 봤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무대는 2019년(올해입니다!) 11월 로스앤젤레스입니다.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인 주인공 데커드에게 지구로 도망쳐온 네 명의 리플리컨트, 로이와 프리스와 레온과 조라를 퇴거(retirement)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리플리컨트는 지구가 이미 황폐화되었으므로 인간이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서 살 수 있게 하는 일을 담당하는 복제인간입니다. 이들은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게 하려고 사람과 똑같이 만들어졌는데 사람과 다른 점은 4년 후에는 모두 폐기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네 명의 리플리컨트는 4년이라는 시한부생명을 거부하고 더 오래 살려고 지구로 도망쳐온 겁니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자기들의 만든 창조자인 타이렐 회사 사장 타이렐을 찾아가지만 그에게서 “생명은 이미 만들 때 정해진 것으로서 바꿀 수 없다.”는 대답을 듣습니다. 이에 로이는 타이렐을 죽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죽인 셈입니다! ‘사람보다 더 사람답게’라는 타이렐 사의 모토에 따라 만들어진 리플리컨트가 자기의 창조자를 죽였습니다.

한편 데커드는 타이렐의 집무실에서 비서 레이첼을 만나는데 그녀는 가장 진보한, 완벽에 가까운 리플리컨트로서 자신이 사람인지 복제인간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데커드가 시험을 통해서 그녀가 복제인간임을 밝혀내자 레이첼은 크게 실망하지요. 생명을 연장하려고 창조자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기까지 한 네 명의 리플리컨트는 하나씩 차례로 죽어갑니다. 마지막에 죽는 로이와 데커드가 싸우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둘의 결투에서 데커드는 인간이란 이름으로 궁지에 몰리고 복제인간 로이가 오히려 인간적 고뇌를 한 끝에 데커드를 구해주고 자신을 죽습니다. 이 대결 후에 데커드는 집으로 돌아와 레이첼이 거기 있는 걸 알고 둘이 어디론가 떠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줄거리를 대충만 얘기해도 영화와 창세기 3장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주제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한 걸음 들어가면 ‘창조자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서의 하느님 자리에 영화는 사람을 놓았고 사람의 자리에 리플리컨트를 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사람이란 존재를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로는 장르가 다른 코미디인 <브루스 올마이티>란 영화가 있습니다. 매사가 잘 풀리지 않아 화가 나 있던 브루스에게 어느 날 자동차 사고가 났고 이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는데 하늘에서 이를 보고 있던 하느님이 마침 휴가를 가면서 당신이 하는 일을 브루스에게 맡깁니다. 브루스는 처음에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되어 모든 일을 자기 멋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온 세상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환청처럼 귀를 울리는 게 아닙니까. 그는 하느님에게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그게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일에 집중하지만 수백만 건이나 되는 기도에 일일이 응답해주는 게 귀찮아서 모든 대답을 YES로 통일해버리고 컴퓨터를 꺼버립니다. 그러자 세계 방방곡곡에서 대형사고가 벌어진다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복제인간의 차이를 매우 미세하고 모호하게 만들어놓고는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복제인간의 창조자인 타이렐을 속절없이 죽임으로써 창조주 하느님이 진정으로 전지전능한지를 묻기도 합니다. 본래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가 복제인간인 로이를 쫓아야 하지만 영화는 이를 뒤집음으로써 뭔가 할 얘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겠고 오늘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첫째로 왜 복제인간은 죽음을 무릅쓰고 지구로 귀환했을까요? 4년 시한부 인생을 넘어서고 싶었을까요? 그보다 더 먼저 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첫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그걸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느님이 말씀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게 했을까요? 둘째로 영화는 복제인간의 감각기관 가운데 유독 ‘눈’에 집중합니다. 복제인간 여부를 가리는 것도 눈을 통해서이고 로이가 타이렐을 죽일 때도 눈을 눌러서 죽입니다. 이는 선악과가 ‘보암직’ 했다는 얘기와 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셋째로 인간과 복제인간은 어떻게 구별할까요?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은 어떻게 구별할까요? 이 질문은 매우 어리석어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가 둘을 뚜렷하게 구별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사람이 이 구별을 무너뜨리려 할 때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도 말할 뿐 아니라 때로는 하느님이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도 있습니다. 마침 영화가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집중하고 있으니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데까지 가보자는 겁니다.

이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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