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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7월 21일 "나 돌아갈래"
글번호 : 810    조회 : 57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7-23 14:56:19   
 
2019년 7월 21일 / 성령강림절 일곱째 주일 / <자유> 3

나 돌아갈래!
출애굽기 13:17-22

곽건용 목사

17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출애굽기 13:17-22).

의지의 자유, 선택의 자유, 존재의 자유

오늘 설교제목 <나 돌아갈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주인공 김영호가 질주하는 열차에 받혀 죽으면서 외친 절규입니다. 오늘은 ‘자유’를 주제로 하는 시리즈 설교 세 번째인데 오늘 얘기하려는 내용과 이 절규가 맞닿아 있어서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자유’가 뭡니까? 자유는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에 모든 지역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사상과 삶의 주제입니다. 그 중 그리스에서 자유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거기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유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쏟아냈지만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세 가지 자유, 곧 의지의 자유, 선택의 자유, 존재의 자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의지의 자유’란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의 의지와 노력으로 나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 의지의 자유입니다. 곧 외부의 힘에 의해 내 삶의 방식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주체가 그것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결부됨은 물론입니다.

‘선택의 자유’는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정했을 경우 그것을 달성할 수단을 선택할 자유를 말합니다. 그리스에서는 예컨대 ‘악을 선택할 자유’ 같은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란 겁니다. 선택의 자유는 바람직한 가치로 삶의 방향을 정했을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를 가리킵니다. 이는 산 정상에 도달하는 여러 등산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존재의 자유’는 앞의 두 가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유로서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만족할 자유’ 그러니까 ‘자기만족의 자유’ 바울의 표현을 빌면 ‘자족할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상에서 그리스사상에 있어서 자유를 아주 거칠게 요약했는데 이 정도만으로도 앞으로 우리가 할 얘기에 도움이 됩니다.

카르마와 자유

불교에서 자유를 얘기할 때 떠오르는 것은 자유와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카르마’ ‘인과응보’ ‘자업자득’ 같은 말들입니다. 자업자득의 ‘업’은 ‘카르마’의 번역어로서 몸과 입, 의지로 하는 모든 언행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인과응보 또는 자업자득이란 지금 나의 존재는 전생에 내가 했던 일의 결과이고 다음 생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는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언행의 결과라는 겁니다. 생물의 ‘유전자’는 과거에 그 생명체가 살아온 과정이 기억되는 장치입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온 생명체의 과거 역사가 유전자에 응축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카르마니 인과응보니 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현대생물학과도 잘 맞습니다.

사람의 ‘성격’이나 ‘정체성’이란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서 행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형성되는 것입니다. 습관이 성격을 형성하고 성격이 정체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마다 타고나는 성격이 있다고 말들 하는데 이 본래부터 타고난 성격이란 것도 조상들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오면서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되어 만들어져온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격 또는 인격에는 오랫동안 때로는 환경과 맞서기도 하고 적응하기도 하면서 축적된 조상들의 삶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역시 불교의 카르마나 인과응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오늘 읽은 출애굽기 13장은 이집트 노예생활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히브리인들의 상황의 한 단면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들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백지상태였던 겁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때까지 노예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그들은 당연히 ‘무엇을 위한 자유’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백지상태였던 겁니다.

속박에서 겨우 벗어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삭막한 광야였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던 거죠.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려면 반드시 그 광야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직선거리로는 길어봐야 며칠이면 통과할 있었던 광야 길을 가는데 40년이 걸린 데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느님이 가까운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이들을 인도하지 않고 먼 길을 돌아가게 한 이유는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맞닥뜨려 전쟁하게 되면 ‘마음이 바뀌어 이집트로 되돌아갈까봐’ 그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마음이 바뀌어 이집트로 되돌아갈까봐’라는 구절에 놓여 있습니다. 곧 다시금 노예생활로 전락할까봐 그랬다는 겁니다. 만일 그렇게 됐다면 강제로 노예가 됐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겁니다. 사실 강제로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게 더 무섭습니다.

우리는 요즘 우리 고국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봅니다. 일본과의 갈등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일본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차피 싸워봐야 질 텐데 그럴 바에는 사정해서 실리를 얻자는 겁니다. 이 주장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자는 주장과 뭐가 다릅니까. 과거 일본식민지 시대에 친일파가 한 언행과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강제였고 지금은 자발적이란 것뿐입니다. 출애굽기 본문은 히브리인들이 그렇게 될까봐 야훼는 먼 길로 돌아가게 했다는 겁니다.

이렇듯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에 대한 답을 얻는 과정에서 흔히 만나는 장애물은 속박됐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유혹입니다. ‘그때가 좋았지…….’라면서 과거를 미화하고 그때로 돌아가려는 유혹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은 정체가 분명합니다. 지금 무엇이 나를 속박하는지는 파악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거기서 벗어나는 일은 어려울지라도 나를 속박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막상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거기서 벗어난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 곧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깨닫는 겁니다. 해방된 히브리인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기 쉬운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로의 회귀도 아니고 방종도 아니면 자유는 무엇인가?

자유는 뭐든지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죽이고 싶은 사람은 맘대로 죽여도 되는 게 자유는 아닙니다. 하느님이 광야에서 당신 백성에게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 동안 돌아다니게 한 것입니다. 이는 여러 번 얘기한 대로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그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일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GPS가 되어서 이들의 길을 인도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획득한 자유가 뭐든지 맘대로 해도 되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테두리 안에 있는 자유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에는 ‘일정한 테두리’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얻은 것은 그리스인들의 세 가지 자유 중 ‘의지의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의지의 자유란 내가 아닌 남이 내 운명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에 빠지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자유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자기들이 지켜야 할 것이 바로 이 자유임을 차차 깨달았던 겁니다.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데 대해서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해도 되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 좋다면 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의지의 자유는 아닙니다.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말은 당연히 거기 따르는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또 내가 외딴 섬에 홀로 사는 게 아닌 이상 나와 똑같이 주체적인 삶을 살 권리를 가진 남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주체적으로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 점은 말로는 쉽지만 삶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자기들끼리 갈등하고 다툰 이유는 이 점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들은 이집트로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결국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았냐는 겁니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겁니다. 파라오에게 복종하는 대신 야훼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또 다른 노예가 아니냐는 얘기인데 이 말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틀린 말입니다. 야훼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주인이 파라오에서 야훼로 바뀐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야훼의 백성을 풀어달라고 했을 때 “사흘 길을 가서 자기들의 하느님 야훼를 예배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야훼를 예배한다.’는 말은 1년 365일 내내 예배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훼의 명령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복종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야훼가 그걸 원했다면 왜 이들이 광야에서 그토록 자주 야훼를 거역하고 배반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는 걸 보고도 내버려 뒀겠습니까. 당장 진멸하지 않고 내버려뒀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도 백성들이 말을 안 듣고 못된 짓을 반복해서 저지르니까 모세가 한 번은 하느님에게 왜 자기가 이들을 이끌고 가야 하냐고, 자기가 이 백성을 낳기라도 했냐고 따진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런 모세가 모든 걸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었다면 그는 동족의 해방이고 자유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만 뒀을 겁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을 그를 괴롭혔던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도 못했고 패역한 백성들을 제압해서 자기 맘대로 독재 권력을 휘두르지도 못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느님에게 계명을 받는 동안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금붙이를 모아 그걸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게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신이라며 미친 듯이 난리굿을 벌였습니다. 이때 야훼는 크게 분노해서 그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는데 모세가 겨우 야훼를 말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죽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전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야훼 하느님의 폭력성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말들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그렇게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데 저는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 짓이 하느님에게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걸 못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 역시 그들의 자유(방종이지만)였기 때문입니다. 그것 역시 자기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 하느님이 강제해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일은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고대인들의 신앙관에 비춰보면 황금송아지 사건을 굉장히 이상한 사건입니다. 그걸 만들어놓고 그게 자기들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준 신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상하지만 야훼가 그걸 그냥 내버려둔 것도 마찬가지로 이상합니다. 당시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불교에서 카르마는 숙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내가 뭘 해도 카르마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카르마는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겁니다. 과거의 업이 현재를 만들었다 해도 현재의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업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카르마가 숙명이 아닌 겁니다. 물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과거가 반복될 수도 있지만 그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노예의 속박에서 해방됐다고 ‘무엇을 위한 자유’까지 확보됐다고 생각하면 크게 오해한 겁니다. 그들에게 현재와 미래는 열려 있는 백지상태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과거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한 과거는 아직 진행되고 있습니다. ‘방종’ 역시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입니다. 황금송아지 사건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고기 가마’라고 하는 허황된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송아지로 상징되는 방종과도 싸우면서 인도하심과 울타리를 동시에 상징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더불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곧 ‘무엇을 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데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 주일에 이어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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