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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8월 4일 "하느님이 떠난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까?" (자유 4)
글번호 : 811    조회 : 39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8-24 09:50:25   
 
2019년 8월 4일 / 성령강림절 아홉째 주일
‘자유’ 4

하느님이 떠난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까?
출애굽기 32:1-6

곽건용 목사

1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아론에게로 몰려가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 3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5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6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출애굽기 32:1-6).

광야 기간은 깨닫는 기간

지난 주일에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히브리인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노예의 족쇄에서는 해방됐지만 그들은 그 다음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상 그때까지 노예가 집단적으로 해방된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대개 선례, 곧 과거의 예를 따라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해방된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길이 없었으므로 새로 길을 만들어야 했던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40년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들어나간 기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첫째로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야훼의 백성이 됐다는 것은 파라오 대신 야훼의 종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얼굴만 바뀌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로 자유는 결코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는 ‘방종’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지난 설교 마지막 부분에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황금송아지 사건에 대해 잠깐 얘기했는데 오늘은 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를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황금송아지가 출애굽의 신이라고?

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그의 모세의 형이고 제사장인 아론에게로 몰려가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이들의 말에는 묘한 대목이 있습니다.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가 어찌 됐는지 모르는데 왜 ‘신’을 만들어달라고 했을까요? 모세가 필요하면 모세의 동상을 만들든지 해야지 왜 신을 만들어달라고 했는가 말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따끔하게 꾸중했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백성들이 갖고 있는 금붙이를 모두 가져오라고 해서 그것을 녹여서 송아지 상을 만들었답니다. 모세와 함께 백성들을 거기까지 이끌고 온 아론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백성들은 황금송아지 상을 보고 그 신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신이라면서 거기다 대고 제물을 바치고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광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훼 하느님은 화가 나서 모세에게 당장 백성들을 쳐서 진멸시키겠다고 했지만 모세가 야훼께 애걸복걸했습니다. 그랬다가는 이집트 사람들이 야훼가 그들을 죽이려고 해방시켰다고 비아냥거릴 거라면서 말입니다. 곧 야훼 자신의 명예가 걸린 일이란 겁니다. 모세가 과거에 야훼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했던 자손과 땅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들먹이며 애원하자 야훼는 뜻을 돌이켜서 내리려던 재앙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정작 자기 눈으로 백성들이 광란하는 것을 보고는 그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판을 던져 깨뜨려버리고 황금송아지를 불태워서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로 마시게 한 다음 거기 가담하지 않은 레위 지파 사람들을 시켜서 무려 삼천 명이나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황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은 사건들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단지 GPS 기능만 한 게 아니란 얘기는 지난번에 했습니다. 백성들이 먹을 음식이 없다고 불평하자 하느님이 만나를 내려준 사건, 삼시세끼 만나만 먹어서 질렸으니 고기를 달라도 칭얼거리자 메추라기를 내려준 사건 등도 단순히 백성들의 배를 불려준 데 그친 일이 아닙니다. 만나는 그 날 먹을 분량만 거둬야 했습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거둬서 쌓아뒀다고 해도 만나는 하루만 지나면 냄새가 나고 썩어버렸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이로써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어떤 경제체제를 세워야 했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주셨습니다. 곧 무한경쟁을 벌여서 끝없이 축적하는 것을 미덕으로 믿고 거기에 기반을 둔 체제가 아니라 분배하고 공유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듯 만나를 통해 이들이 만들어야 할 새로운 사회가 어때야 하는지 보여준 것처럼 황금송아지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명백하게 야훼 하느님을 배신한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사건, 아니 그런 교훈을 얻었어야 했던 사건입니다. 이들은 이 사건에서 얻어야 했던 교훈은 두 가지였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자유는 방종으로 흐를 가능성을 늘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저는 지난번에 제가 지겹던 대학입시생 시절이 끝나고 대학생이 되어 공부라는 게 지겨워서 일부러 외면하고 방종으로 치달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아주 작은 예지만 사실 우리는 매사에 이와 비슷한 유혹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막상 자유의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방종이라는 덧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유할 상태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방종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자기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준 분이 야훼 하느님이란 걸 몰랐겠습니까. 그걸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이 내놓은 금붙이로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어놓고는 그것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준 신이라고 떠들면서 광란을 벌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사람은 자유를 얻으면 왜 그리 쉽게 방종하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대리한다고 여겼던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이들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 불안을 없애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겁니다.

엄격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야훼가 한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히브리인들은 아무 것도 하니 않았습니다. 그냥 야훼가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습니다. 이들이 자기들의 해방을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야훼가 이집트인들에게 재앙을 내려가면서 이들을 해방시켜줬던 겁니다. 그 후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들을 지켜주며 인도해줬고 배가 고프다고 졸라대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어 배를 채워줬고 목마르다고 투덜거리면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해서 갈증을 해소해줬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야훼가 이들을 돌봐줬던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내 그럴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종으로 삼아 강제로 노역을 하게하고 억압한 게 이집트의 파라오였다고 해서 반대로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알아서 다 공급해주고 불평하고 투덜거리면 어르고 달래주고 해달라는 것을 모두 해주는 게 야훼는 아니었습니다. 야훼가 그들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들어준 것은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 뿐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돌봄을 받는 데서도 벗어나 스스로 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곧 지난번에 얘기했던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사상이 얘기한 세 가지 자유, 곧 ‘의지의 자유’ ‘선택의 자유’ ‘존재의 자유’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그 ‘의지의 자유’ 말입니다. 의지의 자유는 나 아닌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체적 의지와 노력으로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의지의 자유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결부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 의지의 자유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라진다면

그것을 깨닫고 배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 동안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을 공급해주던 야훼 하느님이 없어져야 했습니다. 야훼가 백성들을 산 아래 남겨두고 모세를 시내 산꼭대기로 부른 것은 단순히 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주려는 것을 넘어서서 하느님이 백성들에게서 없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들을 돌봐주던 야훼 없이 살 수 있는지를 시험해본 겁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신앙은 둘 중에 하나만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은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이 둘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은 비교적 분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편 139:1-8).

하느님은 어디에 가도 거기 계십니다. 하느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따라서 그들이 하느님에게 벗어나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고대인들은 하느님의 임재(presence)가 느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욥이 인용한 시편의 시인과 정반대의 노래를 불렀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아, 그분(하느님)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느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느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느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느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욥기 23:3-9).

현대인들은 고대인들과는 반대로 ‘하느님 없이’ 사는 데 익숙해져 있고 ‘하느님 앞에서’ 사는 것을 불편해 하거나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현실은 도스토엡스키가 한 “만일 하느님이 없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라는 한 마디 말에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은 그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맘대로 살고 싶어 하는데 하느님이 없다면, 아니 하느님이 없어야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현대인은 ‘제약’이란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여기서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제약을 받는다 싶으면 반사적으로 반발합니다.

저는 현대인들에게는 제약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하느님 없이’ 사는 데 익숙해져 있고 넘치는 자유 때문에 방종으로 흐르기 때문에 족쇄를 채워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 없이’ 그런 위험에 놓인 채 사는 것이, 그런 위험에 놓여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나친 경험 위주의 사고방식과 이성과 합리 중심의 사고, 그리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삶의 방식 때문에 만능의 사회 현대인은 내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고 섣불리 분별해서는 안 되는 영역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내가 알 수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알 수 없는 분) 하느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이 전하는 황금송아지 사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 없이도, 하느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분이 있는 것처럼 살 수 있습니까? 도스토엡스키의 표현을 약간 패러디하면 “만일 하느님이 없다고 해고 방종에 빠지지 않고, 무작정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황금송아지 사건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다음주일은 ‘한반도 평화통일 기도주일’이므로 평화와 통일에 관해 얘기하겠고 그 다음주일에는 ‘자유’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제목은 ‘자유 너머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나는 이런 예수가 싫다!’는 주제로 새로운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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