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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9년 9월 1일 "꼭 그랬어야 합니까?"(나는 이런 예수가 싫다 2)
글번호 : 815    조회 : 60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9-09-03 11:01:53   
 
2019년 9월 1일 / 성령강림절 열세 번째 주일
나는 이런 예수가 싫다! 2

꼭 그랬어야 합니까?
마가 7:24-30

곽건용 목사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합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시오, 귀신이 그대의 딸에게서 나갔습니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마가 7:24-30).

하느님 계명이 갖고 있는 시대적 한계

오늘은 ‘나는 이런 예수가 싫다’ 시리즈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매력적이고 좋아할만한 점들이 많은데, 그것들 얘기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왜 하필이면 싫어할만한 점들을 꼬집어서 얘기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완벽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입니다. 팔레스타인 갈릴리 땅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30여년 그 땅에 발을 딛고 살았던 역사적 예수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도 시대적 한계 안에서 살았던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자물리학이나 미적분을 알지 못했고 당시에 한반도와 인도, 중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모든 것을 다 아는 슈퍼컴퓨터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의 계명들에는 시대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언제 어디서나 옳은 만고불변의 진리도 있지만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옳지 않은 계명들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계명이 만고불변의 진리이고 어떤 계명이 시대적 제약을 갖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사람 대신 결정해주지 않습니다. 짐승제사에 관한 계명들은 시대적 제약이 있는 계명이라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굳이 짐승제사 규정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저 필요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남자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계명은 지금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성서는 동성애를 금한다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성서는 ‘동성애’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합니다. 성서가 여성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하는지 금하지 않는지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성서가 금지하는 동성 간의 성행위는 남성들 간의 성행위에 국한됩니다.

예수님이 기준이라고?

구약성서의 여러 계명들 중에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봐도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의 많은 계명들이 예수님 때문에 무효화됐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여러 계명들을 부정하거나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계명이라는 사실은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Jesus Do)라는 말이 기독교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때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단을 내릴지를 결정하는 기준 역할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순간에 마땅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겨우 30여년을 살다 가신 예수님의 삶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든 경우에 구체적인 답을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습니다.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우리 삶에서 매일매일 벌어집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우리네 복잡한 삶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을 주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2천 년 전의 예수님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지금 환생한다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만일 예수님이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어떻게 했을까?’가 되어야 합니다.

성서 축자영감설이란 주장이 있습니다.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신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성서는 글자 그대로 신앙적 진리(truth)이고 역사적 사실(fact)이라는 것인데 이는 성서가 기록된 고대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현대인의 건전한 상식만 갖고 성서를 읽는다면 전혀 맞지 않는 주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입받았기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이런 태도를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약성서의 계명들 중에 지금은 지킬 필요가 없거나 지켜서는 안 되는 것들은 많은 까닭은 예수님이 그것들을 폐기하셨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절대로 실수나 오류가 없다는 겁니다. 짐승제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걸 폐지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폐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걸 해야 한다는 거죠. 계명의 정당성을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다만 ‘어떤’ 예수님이냐가 문제입니다. 2천 년의 예수님을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가치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제입니다.

지난 주일에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을 받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실제로는 예수님 자신은 전혀 원치 않았을 분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원했을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믿었으면 좋겠다고 원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하면 됩니다. 그 시대에도 예수님은 “나는 여러분이 믿는 것 같은 ‘그런’ 메시아가 아닙니다.”라고 여러 번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에 김지하 시인이 ‘금관의 예수’라는 글에서 썼던 대로 예수님에게 금관을 씌워 돌덩이 속에 가둬두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인종주의자인가?

오늘 우리는 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한 이방 여인 얘기를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합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유대인을, ‘개’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명백하게 이 여인이 이방인이라고 해서 개 취급하며 능멸한 것입니다.

‘개’는 유대인들에게 귀여운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반려견은커녕 애완견도 아니었습니다. 성서와 성서 밖의 유대인 문서들에게 개는 예외 없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개’가 이방인을 의미하지만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도 남을 비하라거나 모욕할 때, 그리고 스스로를 낮출 때 ‘개’를 은유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14절, 사무엘하 3장 8절, 9장 8절, 16장 9절, 열왕기하 8장 13절 등에 그 예들이 나오는데 시간관계상 찾아보지는 않겠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개’는 명백하게 비하하는 뜻으로, 상대방을 모욕하는 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렇듯 개 취급을 받은 여인이 투덜거리거나 예수님을 욕하고 돌아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녀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이 한 말을 오해합니다. 이 말은 개 취급을 당하더라도 딸에게서 귀신만 쫓아내면 된다는 심정으로,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한 번 더 애걸한 게 아닙니다. 물론 그런 뜻도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애걸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예수님의 뒤통수를 때린 발언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좀 다를까 기대했는데 당신도 별 수 없군요. 날더러 개라고요?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것은 먹거든요!’라고 말한 겁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석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렇게 듣고 그렇게 배웠을 겁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청을 들어줄 마음이 있었지만 과연 여인이 그럴만한 믿음의 소유자인지 알아보려고 짐짓 이런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에 여인이 개도 주인의 상 아래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함으로써 시험에 통과했기에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고쳐줬다는 겁니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녀에게 인격적인 모멸을 가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은 분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면 저부터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시험해보려고 그를 능욕하는 분, 그런 모욕을 감수하지 않으면 자기를 따를 수 없다고 믿는 분을 저는 내 주님으로 믿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은 하느님의 선민이고 이방인들은 ‘개’라는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인 복음서를 잘 살펴보고 확인해봐야 합니다. 복음서에는 인종적 편견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인정하는 듯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마태 10:5~6)이나, 당신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마태 15:24)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유독 마태복음에 주고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 가장 유대적인 색채가 강한 복음서입니다. 왜 마태에 이런 말씀들이 전해지는지를 설명하자면 길게 얘기해야 하지만 결론만 말하면 이런 말들에는 예수님의 사상보다는 마태복음 기자의 생각이 더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말씀들은 이방인을 개 취급하는 것과는 색깔이 분명히 다른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얘기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을 대한 태도(요한 4:1-42)를 보면 예수님을 인종주의자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마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방인들보다 더 심한 차별을 받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마리아인, 그것도 이중차별을 당했던 사마리아 여인과 한 나절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런 일은 유대인 남자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방 땅인 거라사 지방에서 기적을 행하신 일(마가 5:1-20)도 그렇습니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그 지역 사람이었다면 그는 십중팔구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전혀 구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백부장의 종을 고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런 믿음은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일(마태 8장:5-13)은 유대인들이라면 기함을 할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씀했으니 말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마태 8:10-12).

이런 일들을 종합해서 보면 예수님이 이방 여인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추측입니다. 예수님이 인종주의자여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 역시 추측이고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려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추측입니다. 저는 다만 어느 추측이 더 개연성이 높은지를 따져보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인종주의자여서 그렇게 말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식적으로는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역시 시대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았던 분으로서 시대적 한계 안에 머물던 시대의 아들이었으므로 여인의 호소를 듣고 깜빡하셨다고 봅니다. 그 당시 유대인 남자가 갖고 있던 일반적인 통념대로 얘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인으로부터 크게 한 방 먹었습니다. 개도 주인의 상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고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은 잠시 잠자고 있던 예수님의 인종적 감수성을 깨워준 겁니다. 예수님이 여인의 호소에 응답해서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신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진 당연한 수순이었고요.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완벽한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인종적 감수성이 잠시 외출을 했었다느니 여인의 말 덕분에 잠시 외출했던 예수님의 인종적 감수성이 다시 돌아왔다느니 하는 얘기가 여러분에게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는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구세주이고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도 완전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서, 그것도 이방 여인에게서 뭔가를 배웠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인간적인 면에서 완전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약점을 가진 분이었고 시대적 한계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말할 때 오해하는 점은 기독교의 하느님의 아들은 희랍신화에서처럼 하느님이 ‘낳았다’는 의미가 아니란 점입니다. 희랍신화에서는 신들이 여신들과 사랑을 해서 자식을 낳습니다. 신의 아들이자 곧 신이 태어나는 겁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낳았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를 신의 아들이자 신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도 파라오는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지배층은 파라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집트에서는 인간 파라오를 신으로 여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는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구약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자식을 낳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아들로 불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희랍신화에서처럼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 게 아닙니다. 또한 구약성서는 이집트에서처럼 파라오 같이 특정한 사람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신성을 나눠가졌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자 사람이라는 말은 절반은 하느님이고 절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은 갈릴리 예수님을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해주셨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걸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예수님은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아들로 인정을 받은 것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은 겁니다.

과거에는 제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대체 왜 그러셨어요? 그 이방여인에게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꼭 그랬어야 했나요?”였습니다. 제가 설교에서 여러 번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묻고 싶은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어볼 겁니다. “여인에게 한 방 먹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 이방 여인에게 뒤통수 한 대 제대로 맞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저는 인간적으로 완전하고 완벽하고 물 셀 틈 없는 예수가 싫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예수가 싫은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예수님 상이 싫은 거네요. 사람이 만든 예수 상이 아니라 예수 자신에게 싫은 점이 발견될 때까지 계속 이 시리즈를 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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