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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산책
제 목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창세기 1:1)
글번호 : 3    조회 : 1223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06-10-22 0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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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겠지요. 그런데 지금부터 5백 년 전만 해도 인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구가 평평한지 둥근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시대를 앞서 가던 소수의 과학자들과 교리 사수의 사명감에 불타는 신학자들 뿐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잘못된 지식을 고쳐야 한다는 열정에서, 그리고 신학자들은 세속세계의 공격으로부터 성경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문제를 초미의 관심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알다시피 결과적으로 교회는 이 대결에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그 어떤 보수적인 목사나 사제도, 심지어 바티칸조차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구 밖에 나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거든요.

성경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평평하다는 말도 없습니다. 다만 천체에 성경이 어떻게 묘사하는가를 읽어보면 성경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에게는 만유인력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바다 끝에 가보면 (물론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밑으로 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알 턱이 없는 고대인들은 돔(dome) 모양의 천체에 해와 달과 별들이 매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돔 모양의 궁창 위에는 바다처럼 물이 가득 차 있고 간혹 궁창에 달려 있는 창문이 열려 그 위에 있던 물이 지상으로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것을 비(rain)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창세기 1-11장뿐 아니라 욥기 37장 등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체물리학에 따르면 지금도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얼마나 넓다고 생각했을까요? 고대인은 하늘이 얼마나 높다고 생각했을까요? 해와 달과 별들이 매달려 있는 창공(또는 궁창)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다고 믿었을까요?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성과 대를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게 하자.” 이 말 그대로라면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으리라고 믿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대체 탑을 얼마나 높게 쌓았기에 그런 당차고 야무진(!)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63빌딩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정도로 높았을까요? 당시 사람들의 기술로 그것이 가능하기나 했겠습니까? 고대 중동 학자들과 성경 학자들은 중동지방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지구랏 (ziggurat) 과 바벨탑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지구랏의 높이는 63빌딩보다 턱없이 낮습니다. 저도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통해 알 따름인데 어떤 책을 보이 지구랏이 높은 것은 99 미터나 되는 것도 있답니다. 이 정도도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긴 고대인들은 피라밋도 만들었으니 그들의 기술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좌우간 당시 사람들의 과학 지식과 기술은 이 정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도 몰랐다는 말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성경은 뉴턴의 법칙을 알지 못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보다 무식하다는 말이냐?”고 말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저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던 사람들의 지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시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뭐라고 왈가왈부하겠습니까? 지극히 제한된 지식만을 갖고 있을 따름인 인간이 하나님의 ‘앎’에 대해 아는 척하는 일이 가당하기나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시는 모든 것을 인간에게 알려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식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유치원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때가 됐기 때문에 뉴턴의 법칙이 나왔고 시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법칙이 나왔으며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것입니다. 3천 년 전의 고대인들이 갖고 있던 지식, 특히 과학지식은 오늘날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고대인의 지식수준이 반영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창세기를 읽고 나서 “창세기는 엉터리야. 과학적으로 터무니없이 틀린 말들만 써 있어.”라며 대단한 발견이나 했다는 듯이 흥분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창세기가 틀린 것이 아니라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 사람들의 과학지식 수준이 그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가 보여주는 과학은 그 당시의 눈으로 보면 놀랍도록 높은 수준의 과학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얘기할 여유가 없네요. 직접 소개하지 못해 무책임하게 보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번하드 앤더슨 (Bernhard Abderson) 교수의 책 ≪창조에서 새 창조로≫From Creation to New Creation에 실려 있는 ‘신학과 과학’ (Theology and Science)이나 롤프 크니림 (Rolf Knierim) 교수의 책 ≪구약신학의 과제≫ The Task of Old Testament Theology에 실려 있는 ‘이스라엘 신학에서 우주와 역사’ (Cosmos and History in Israel’s Theology)와 ‘성경 안에서의 과학’ (Science in the Bible)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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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가 과학 지식을 전해 주려는 책도 아니고, 또 여러 신들이 자기가 최고라고 각축을 벌이는 경쟁의 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로 뛰어난 신임을 힘주어 말하려는 책도 아니라면 창세기는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을까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선언은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요?

창세기 1-11장을 잘 읽어보면 이 텍스트에 담겨 있는 생각의 지평이 엄청나게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는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는 신들의 경쟁 같은 것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등장하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래서만은 아닌 듯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그런 따위의 생각쯤은 훌쩍 뛰어넘어 더 높고 더 넓은 마당에서 생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누구와 대항하거나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진화론이나 그 밖에 다른 과학적 주장에 반대하기 위한 선언도 아닙니다. 이 선언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뗄래야 땔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분리될 수 없이 묶여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의 속성과 피조물의 속성이 혼합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터럭만큼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창조주와 피조물이 끊임없이 서로 교통하고 있고 교제하고 있다는 뜻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련성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비교하는 것은 적어도 창세기 1-11장의 관심 밖의 일입니다. 텍스트의 유일한 관심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데 있습니다. 무엇이 이 관계를 가능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관계 맺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바라’라는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동사의 용법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창조하다’ ‘만들다’라는 뜻의 이 단어의 주어는 오로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주어인 경우는 성경에서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라’라는 동사가 쓰였을 때는 창조에 사용된 재료 (material)나 수단 (means)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창조 또는 창작은 대부분 어떤 재료를 변형시켜 다른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인데 ‘바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오랫동안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사용해온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말은 비록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려는 바의 전부는 아니지만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창조행위를 통해서 전적으로 ‘새롭고’ 전적으로 ‘독특한’ 그 무엇을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연히, 심심해서, 혹은 장난 삼아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쌓았다 부숴버리는 모래성처럼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과 의지를 갖고, 고치거나 변경하지 않고 단 한 번에(once and for all) 전적으로 새롭고 독특한 그 무엇을 존재로 이끌어내신 것 (bringing into being)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고, 창세기 1장 1절은 창조의 바로 이런 성격에 대한 장엄한 고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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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주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선언한 후 2절에서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묘사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진도 나가야 하니 덮어두겠습니다. 3절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서술하는데 그 하나 하나의 행위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흙을 빚어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는 창세기 2장의 하나님과는 달리 오로지 ‘말씀하는 행위’만으로 창조를 시작하셨고 끝맺음 하셨습니다. 

‘말하다’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 행위는 누군가가 ‘듣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허공에 대고 말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너무 그러면 정신건강을 의심 받을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누군가 듣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사실 말을 하는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대방이 자기 말에 대해 반응을 보이기를 원합니다. 곧 누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반응하기를 기대하면서 하는 행위란 말입니다. 곧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의 성격은 바로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써 무엇인가를 존재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렇게 존재로 이끌려나온 것이 바로 피조물입니다. 곧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존재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습니다. 아무도 이 말씀에 딴지를 걸 수 없을 뿐더러 이 말씀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힘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은 억압하고 강제하는 힘을 행사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권위’ 하면 곧 억압과 강제가 떠오르는 까닭은 우리가 기나긴 세월을 군사독재 치하에서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자리 하는 곳은 강제와 억압이 아니라 피조물로부터 ‘자발적인 응답’을 이끌어내는 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로부터 응답을 이끌어내지만 그것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자기들이 하기 싫은 3 D 업종의 일들을 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종처럼 부려먹으려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분도 당시 중동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이 신화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의 동반자 (partner)의 자리에 올려 놓습니다. 하나님이 삼라만상, 특히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대화(conversation)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넓게는 상호작용(interaction)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기는 ‘말하고 듣는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한 번 맺어지면 영원불변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늘 새롭게 던져지는 말씀을 듣고 새롭게 응답해야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이 신뢰는 상대방에 대한 신실함과 헌신이 쌓여야 굳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확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깨어지기 쉽고 변화무쌍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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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얘기를 마쳐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수 천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입으로 고백된 신앙이지만 그 때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고 지금은 시효가 끝나버린 고백이 아닙니다. 과학 지식이 늘었다고 해서, 그에 따라 세계관이 달라졌다고 해서 진리성을 상실한 고백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과학적 진실을 밝히려는 선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는 무관하고 오로지 신앙 하고만 관련된 고백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현대 과학의 이성과 합리성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창세기는 ‘오로지’ 신앙 하고만 관련된 고백이라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그것이 기록될 당시에 사람들이 갖고 있던 최고의 과학 수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현대 과학 수준보다 낮을 뿐이지, 과학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오늘날의 과학 수준에 맞춰서 새롭게 고백될 수 있다고, 아니 새롭게 고백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과학과 관련해서만 새롭게 고백되어야 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인간 정신세계의 모든 면과 관련해서, 그리고 인간이 현실세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모든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모든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창세기는 늘 새롭게 고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오늘의 정신적, 물질적인 삶에로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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