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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산책
제 목 : 왜 하필 동산 한 가운데 두셨을까? 1 (창세기 2-3장)
글번호 : 4    조회 : 598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06-10-22 04: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9 개역성경)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같은 곳, 공동번역 성경)

“And 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made to grow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fe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같은 곳, RSV)

“And from the ground the LORD God caused to grow every tree that was pleasing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with the tree of life in the middle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bad.” (같은 곳, Tanakh)

 

                                             1

 저는 영화관람을 매우 좋아해서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영화를 보곤 합니다. 제가 사는 이곳 로스엔젤레스가 영화의 본고장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를 누리지는 못합니다. 물론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유럽이나 아시아 영화는 상영하는 극장이 제한되어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잘 보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 더 다양한 종류의 영화를 봤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인데 추리영화만큼은 제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추리영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누가 범인인지 알쏭달쏭하게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복잡하게 이끌고 가서 끝에 가서 비로소 범인이 밝혀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둘째는 처음부터 누가 범인인지 알려준 다음에 왜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유를 밝혀나가는 영화입니다. 이 두 종류의 추리 영화 모두 잘 만들면 나름대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긴장을 잃어버리면 '범작'이 되고 맙니다. 왜 추리 영화들 중에서 제 입맛에 맞는 영화가 별로 없다고 하는가 하면 끝까지 누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긴장감 넘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거나 마지막에 극적인 반전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영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래에 본 추리 영화 중에서 감탄하면서 본 영화는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였습니다.

만일 결말을 알고 본다면 추리 영화보다 더 싱겁고 재미없는 영화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식스 센스’ 같은 영화는 결말을 알면 그 이상 싱거울 수 없습니다. 사실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미리 인생의 결말을 안다면 그 인생은 김빠진 사이다 같은 것이 되고 말겠지요. 그래서 저는 점 보러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점쟁이 말이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용한 점쟁이가 있어 그가 내 앞일을 미리 알려 준다 해도 저는 점을 보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앞날을 미리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앞날을 미리 안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겠습니까? 인생이 미리 예정되어 있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의외의 사건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며 뜻밖의 사람과 만나 생각하지도 않게 얽히고 설키는 일이 없다면 그런 인생은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인생을 재미로 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왜 굳이 노력하고 애쓰고 분투하며 살겠습니까? 그래서 만일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람 생이 그리 행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안다면, 언제 누굴 만났다 어떻게 헤어질지 다 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결말이 어떻게 맺어질지 미리 안다면 무슨 맛으로 사랑을 할 것이며 무슨 기대를 갖고 인생을 살겠습니까?

저는 이런 ‘불경한’ 생각까지 해봤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다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고 계실까? 내가 내일 무슨 일을 할지, 그리고 1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하나님은 미리 다 알고 계시다면 과연 하나님은 나에 대해 무슨 ‘기대’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미리 다 알고 계신데 뭘 기대하겠습니까? ‘기대’의 첫째 조건은 ‘불확실성’입니다. 불확실하니까 기대도 하는 것입니다.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그 어떤 신뢰할만한 구석이 있을 때 기대라는 것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이끌어나가시며 제 생을 인도해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운명'은 믿지 않습니다. 제 믿음은 ‘운명론’과는 다릅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어 기차가 궤도를 따라 달려가듯 역사는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란 운명론을 섭리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개인의 생이든 공동체의 삶이든, 아니면 인류의 미래든 인간의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와 상호작용의 결과입니다. 이 믿음이 진정한 섭리 신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자유를 갖고 있으므로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궤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며 길을 만들어나갑니다. 인생은 때로는 이미 잘 닦여 있는 길을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길 아닌 곳으로 잘못 들어가서 되돌아 나와야 할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새로 길을 닦으면서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평탄한 길이거나 험악한 길이거나, 곧은 길이거나 굽은 길이거나, 밝은 대낮이거나 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밤이거나 이 모든 여정에 하나님께서 늘 나와 동행해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2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서 우리는 본격적인 ‘이야기’ (story)를 만납니다.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드러나고 사건의 시작과 전개, 위기와 결말이 있는 글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은 ‘이야기’라기보다는 ‘찬송가’라는 느낌을 더 많이 줍니다. 장엄하면서 계속 같은 문장이 반복되고 운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한글 번역성경은 그 맛이 좀 덜한데 영어 성경이나 히브리 성경을 읽어보면 창세기 1장이 찬송이라는 느낌을 좀더 강하게 받습니다.

창세기 2-3장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자주 이야기 되고 설교 되는 텍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 (아담)을 만드신 이야기, 에덴 동산 안에 있던 두 나무, 곧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 에덴을 둘러 흐르는 강에 대한 묘사,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 붙여준 이야기, 동물들 가운데 배필을 찾지 못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갖고 여자를 만드신 이야기, 그리고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남편과 함께 선악과를 따 먹은 이야기와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뱀과 땅을 심판하신 이야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그들을 에덴에서 내쫓으시고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불칼’ (히브리 원어로 ‘라하트 하헤렙’인데 이는 소설가 조성기 씨가 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합니다)로 지키게 하신 이야기 등이 창세기 2-3장에 적혀 있습니다.

창세기 2-3장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김 새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텍스트가 성경 전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만큼 중요한 텍스트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덴 동산에서 벌어졌던 이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성경의 다른 책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28장이 스쳐 지나가듯 에덴 동산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신약성경에 와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대조해서 비교적 길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한 대목이 있으며, 요한계시록 22장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에덴 동산과 비슷하게 묘사한 대목이 있는데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오히려 신구약 중간시대에 쓰여진 책들 중에는 에덴 동산과 아담, 하와의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4 에스라서가 대표적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성에 비해서 에덴 동산에서의 사건이 언급되는 빈도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많이 언급될수록 중요한 텍스트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 학술 논문이나 책의 권위도 다른 논문이나 책에서 얼마나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고 있는가가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언급되는 빈도수와 중요성 사이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근본적으로 피할 수는 없다고 해도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미 내가 아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읽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해서 갖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성경을 읽으려는 경향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성경 읽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신앙은 거기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텍스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마치 텍스트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텍스트로도 늘 새롭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창세기 2-3장이 오랫동안 텍스트 그 자체로 읽히지 않고 그 위에 기독교 교리가 덧씌워져서 읽혀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이 텍스트를 ‘인류의 타락’과 ‘원죄’ 교리를 뒷바침하는 말씀으로 읽어왔습니다. 또 죄와 그것의 결과인 죽음이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로도 읽혀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무리 교회 전통을 중시하면서 텍스트를 읽는다 해도 창세기 2-3장을 ‘타락’과 ‘원죄’에 대한 이야기로 읽거나 죄와 죽음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독서 방법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 텍스트가 말하려는 바가 그것인가 라는 물음을 갖고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본문의 의미를 본문 안에서부터 ‘끄집어내는’ 독서 방법이 아니라 본문 밖에서 본문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생각을 본문 속으로 ‘집어넣는’ 독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한 해석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라고 항변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덴 동산의 이야기를 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하고 싶은 말 다 했다가는 궤도를 너무 벗어나 너무 멀리 나가에 되니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틀렸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울이 그렇게 해석한 목적이 무엇이고 그런 해석은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만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3

 이 글 맨 앞에 인용한 창세기 2장 9절의 각 번역본을 보면 모두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16절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짧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많은 질문을 낳습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본래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던가요? 만일 그렇다면 지구는 그 많은 인구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곧 포화상태가 될 텐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당일에 죽지 않았고 무려 930살까지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6: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허언(虛言)을 하셨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고 스스로 감탄하셨는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매우 좋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요? 사람의 어떤 점이 하나님에게 매우 좋게 여겨졌을까요?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하나님은 미리 아셨을까요? 만일 아셨다면 금지 명령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어길 줄 뻔히 알면서 금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겠지요. 만일 어길 줄 모르셨다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전지전능한 분이란 말입니까? 왜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을까요? 아무래도 외진 데보다는 동산 한 가운데가 눈에도 잘 띠고 통행량도 많지 않았겠습니까? 견물생심 (見物生心)이라는 말도 있는데 만일 사람이 선악과를 먹지 않기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다면 그 나무를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두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 그 나무들을 동산 한 가운데 두셨는가 말입니다.

이 중에 가장 강하게 제 관심을 끄는 질문은 마지막 질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않기를 정말 바라기는 하셨던 것일까?’ 라는 엉뚱한 질문을 해봅니다. 물론 원치 않으셨으니 금지 명령을 주셨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것을 동산 한 가운데 두셨는가 말입니다. 길이 아닌 곳으로는 가지도 말고 유혹을 느낄만한 것은 바라보지 않는 것이 범죄를 피하는 길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신 이유는, 정말로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을지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가 일의 결과를 궁금해 하면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듯이 하나님도 일의 결과를 그렇게 지켜보셨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궁금한 것이 있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지요? 호기심이란 말도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요?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은유 (metaphor)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썩 잘 어울려 보이는 말들도 사실은 모두 인간세계나 자연세계를 묘사하는 데서 비롯된 은유입니다. ‘궁금증’이나 ‘호기심’이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면 ‘시험’이란 말로 바꿔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시험은 결과를 미리 알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시험을 하고 결과를 알려고 시험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지 바치지 않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물론 아들 대신 양이 준비되어 있으리라고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다는 말은, 사람이 당신 계명을 지키는지 여부를 하나님께서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계명이 지켜지기를 기대하셨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사람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자식들이 억지로 부모 말을 듣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복종하는 시늉을 하는 것보다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동의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창세기 2-3장 이야기를 맺으려면 갈 길이 먼데 글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접고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이 블로그 글은 매주 주말 (미국 시간으로 금요일이고 한국 시간으로는 토요일)까지는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별 다른 일이 없으면 매주 1회 글을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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