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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산책
제 목 : 왜 하필 동산 한 가운데 두셨을까? 2 (창세기 2-3장)
글번호 : 5    조회 : 1146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06-10-22 04:18:41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6-17, 개역 성경)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같은 곳, 공동번역 성경)

“You may freely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you shall not eat, for in the day that you eat of it you shall die.” (같은 곳, R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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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글에서 얘기했듯이 창세기 2-3장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난생 처음으로 본 ‘시험’ (tes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험문제 출제자는 하나님이고 응시자는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뱀은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서 있었던 교란자가 되겠지요. 시험 응시자로 하여금 문제를 혼동하게 만들고 그 결과도 마음대로 조작하려 했던 교란자 말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가장 제 관심을 가장 끈 부분은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다는 대목이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를 ‘시험’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 시험을 볼 것이면 문제지를 응시자가 찾을 수 없는 곳이 감추는 출제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혹시 아담과 하와가 문제지를 찾지 못할까 봐 생명나무의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 문제 출제자는 ‘과연 이 문제를 누가 맞출까?’ 궁금해 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도 그랬을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맞는 답을 쓸지 틀린 답을 쓸지 궁금하셨을 겁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운명론적으로 미리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도 시험 결과를 미리 알지 못하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라는 교리에 분명 어긋납니다. 하나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든지 하나님도 미리 알지 못했다든지 하는 말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록 교리에는 어긋난다 해도 창세기 2-3장을 다른 방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까? 제게는 이 본문을  달리 읽는 방법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강제로 못 먹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아시면서도 막지 않으셨는가? 미리 아셨으면서도 왜 선악과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을까?’ 라며 투정조로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여기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읽습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무한히 인간을 존중해주시고 신뢰해주신 하나님이 저는 고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인간에게 배반당하시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믿고 존중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제 믿음은 깊어지면 깊어졌지 옅어지지는 않습니다. 자주 배반당하시면서도 피조물의 자유로운 결단을 끝내 존중해 주시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이 제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시험을 치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신 이유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우선 그 나무들을 ‘주목’하기를 바랬다는 얘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런 나무들이 거기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 살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를 원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담과 하와가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것과 시험에 불합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지요. 경쟁이 두려워 피하는 사람과 경쟁에 진 사람, 여러분에게는 둘 중 누가 더 소중합니까? 여러분 자녀는 어느 편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비곡 지더라도 떳떳하게 경쟁에 임하는 쪽이 아닙니까?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험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를 출제한 출제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왜 수험생은 틀린 답을 내놓았는지,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시험장 분위기보다는 시험 문제의 내용과 거기 담긴 의미와 그 결과겠지요. 이제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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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 문제는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물음표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것이 시험 문제였습니다. 이 시험에서 실패했을 때 초래될 결과는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혹시 융통성 같은 것을 기대할까 봐 ‘반드시’라는 부사어를 넣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죽는다’는 동사의 절대부정법(absolute infinitive)와 미완료서술형(imperfect)을 나란히 썼는데 힘주어 강조할 때 가장 널리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죽는다’는 단어는 그야말로 평범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니고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라는 말에서 보듯이 때론 이 평범한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는 전후문맥을 살펴봐야 알 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시험에서 실패하면 ‘후기 시험’을 치르거나 ‘재수’할 기회 같은 것은 없어 보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가는 모종의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어투에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3장의 관심은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작에는 선악과 나무가 유일한 관심사였는데 나중에 생명 나무도 그렇게 됐다고 해야겠지요. 생명 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야 비로소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이야기 마지막 부분인 창세기 3장 22-24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히신 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래서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고 에덴 동산 동쪽에 거룹들과 빙빙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도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선 지금 하나님은 누구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지가 불분명합니다. ‘그 사람’은 분명 아담을 가리키는데(그럼 하와는 어디 갔을까요? 하와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와는 생명 나무 열매를 먹어도 영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를 가리켜 3인칭을 쓰고 있으니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듣긴 들어도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대상으로 말씀하셨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와가 대상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은 빼버리고 하와 하고만 더불어 ‘우리’라는 1인칭 대명사를 쓰셨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와가 한 편이 돼서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려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라는 1인칭 대명사는 누굴 가리킬까요? 하나님을 포함하는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하나님, 아담, 하와 말고 누가 그 자리에 있어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되었는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천사들’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 본문이 분명히 밝히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말고 하나님 주변에 있었던 복수의 존재들, 이 이상으로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시 우리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시험 문제는 결국은 ‘금지 명령’인데 우선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말씀함으로써 금지하기 전에 먼저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허락된 것은 생명 나무 열매를 포함해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금지하시기 전에 먼저 허락하셨는데 허락된 품목이 금지 품목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오로지 선악과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먹었으니! 하긴 본래 얘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게 마련이긴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오직 한 가지만 금지했는데 그걸 어긴단 말입니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남에게는 있고 자기에게는 없는 것이 갖고 싶어 안달을 하고, 많은 것이 허락됐지만 그것들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고 금지된 것 하나에 대해 불평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분명 사람에게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것이 뭡니까? 내게 금지된 것에 대해 불평하기 전에 내게 허락된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하고, 내게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질투, 시기하기 전에 내게 있는 것들에 대해 만족하고 고마워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금지됐을 때 왜 그것이 금지됐는지를 알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내게 없는 것은 포기하고 살자는 뜻도 아닙니다. 하지만 허락된 것과 갖고 있는 것을 감사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보퉁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여 무엇이 없다고 해서, 무엇이 금지됐다고 해서 (목사들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불평하지 말고 제가 갖고 있는 것들, 제게 허락된 것들에 대해 먼저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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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으로 유일한 금지 품목인 ‘선악과’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선악과의 공식 이름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여 아는 지식이 생긴다는 뜻이겠지요. 히브리 원어로도 같은 뜻이므로 이를 달리 이해하거나 번역할 방법도 없고 또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것을 따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는 뜻은 그들이 선과 악을 구분하여 아는 지식을 갖기를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셨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식을 갖기를 원치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선악을 구분하는 지식 그 자체가 인간에게 속하지 않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런 구분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기를 원하셨을까요? 전자의 의미로나 후자의 의미로나 납득이 안 되기를 매 한 가지입니다. 이런 점들이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 설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2-3장을 읽으면서 궁금하고 답답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인도자에게 질문하신 적은 없었습니까? 인도자는 어떻게 대답하던가요?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대답을 얻으셨습니까?

이 글을 쓰는 저도 계속 궁금하게 생각해왔고 여러 번 질문도 해봤고 대답을 얻으려고 나름대로 책도 꽤 많이 뒤져봤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왜 이 답답함을 달래줄 사람이나 책이 없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수 천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갖고 씨름했을 텐데 이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물론 제가 그 사람들의 연구를 모두 뒤져본 것은 아니므로 자신 있게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궁금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과연 나의 궁금증은 정당한 궁금증인가? 나는 텍스트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궁금해 하는가, 아니면 텍스트는 별 관심도 없는 문제를 쓸데없이 궁금해 하는가? 텍스트가 선악과의 성격이나 그것이 갖고 있는 힘이나 기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독자들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에 대해 아예 말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느 편이 맞든 좌우간 선악과의 성격이나 기능을 밝히는 일이 텍스트의 근본 의도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이 생각이 맞다면 저는 그 동안 엉뚱한 의문을 갖고 괴로워 했던 것입니다. 성경 텍스트는 내가 궁금해 하는 모든 질문에 답을 줘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성경은 거기만 가면 원하는 것을 다 살 수 있는 만물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만 열어보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백과사전도 아닙니다. 이 사실을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텍스트가 선악과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앞에서 인용한 창세기 3장 22절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보라, (선악과를 따 먹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라는 말이 전부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니 ‘우리 같이 되는 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 ‘우리’ 안에는 하나님도 포함되니 인간의 본래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갖게 되거나 그런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 정도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시험 문제의 본질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그 결과 무엇을 더 알게 됐는가, 다른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시험 문제의 본질은 금지 명령 그 자체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치른 시험의 본질은 금지 명령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여부였습니다. 시험 문제에 어떻게 답하는가는 출제자에 대한 신뢰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 아니라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어 줄 것 같아서 자기도 먹고 남편에게도 줬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3:6). 미각과 시각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지식욕’까지 자극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미각과 시각과 지식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trust)를 저버렸습니다. 동산 안에 미각과 시각을 만족시킬 열매가 선악과 하나만은 아니었을 터이니 문제는 ‘지식욕’이었다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마디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맞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려면 ‘무식’해야 합니까? 텍스트는 신앙을 가지려면 자꾸 따지거나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요? 의문을 품지도, 의심을 하지도 말고 눈 딱 감고 무조건 믿으란 말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반계몽주의 (obscurantism)를 조장하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실제로 한국 교회 안에는 반계몽주의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따지고 묻는 태도가 신앙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목사들도 따져 묻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목사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목사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따져 묻지 않는다는 말은 ‘지성’을 포기한다는 말이므로 이것이 신앙생활을 포함해서 전반적인 삶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는 없겠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다른 일에는 굳이 이치를 따지고 설명을 요구하면서 왜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홍준 선생은 문화유적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하물며 신앙에 있어서는 오죽 하겠습니까! 신앙도 묻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믿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는 것을 포기하는 일은 믿기를 포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아는 것’이라 함은 가방 끈의 길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육을 많이 받았고 좋은 학교를 다녔는가는 신앙을 아는 일과 크게 상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에서 아는 것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여부에 달려 있고,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진지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신앙이기 때문에 알려고 하는 노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7

 그렇다면 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처벌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선악과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어 줄 것 같아서 그것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지식을 얻으려는 의도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게 왜 문제입니까? 아는 것이 신앙에서 중요하다면 이게 왜 잘못된 행위란 말입니까? 저는, 아는 것이 신앙에서 중요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최우선은 아닙니다. 우리의 텍스트는, 신앙에서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알아야 하지만 그것을 신뢰와 바꿀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뱀은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뱀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뱀이 터무니없는 얘기로 하와를 유혹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선 뱀은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하와는 모르지만 아담은 그 후로도 930살까지 ‘지겨울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하와도 선악과를 따 먹은 당일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정이야 어쨌든 뱀이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고 단호하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한 내용, 곧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는 내용을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뱀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창세기 3:22) 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럼 ‘뱀이 하와에게 했던 얘기를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지 않으셨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 이라고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처럼 되는 것’과 ‘반드시 죽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이제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었으니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까 봐 거룹들과 불칼로 거기로 가는 길을 막아 하나님처럼 되는 길을 차단하시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만일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 먹는다면 생명 나무 열매를 절대로 따먹지 못하게 하리라고 진작부터 작정하셨던 것일까요? 그래서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이해해도 ‘왜 하나님은 뱀이 하와에게 했던 얘기를 아담에게 하지 않으셨을까?’ 라는 의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저는 여기서도 ‘신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왜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텍스트가 말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만일 그걸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너무나 큰 유혹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지나치게 유혹적인 시험 문제를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이 말에 너무 큰 비중을 두시지는 마십시오. 텍스트 안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추측일 뿐이니까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죄’ (sin)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첫 죄를 어떤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어떻게 성격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 교만?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살려는 욕구? 다 일리가 있지만 저는 텍스트가 보여주는 죄의 성격은 한 마디로 해서 ‘신뢰 없음’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 죄였습니다. 신뢰하지 않는 데서 불순종도 나오고 교만도 나오며 한계를 넘어서는 자율도 추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해 보이지요? 그런데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네요. 텍스트가 말하는 ‘신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신뢰 뿐 아니라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대한 신뢰까지 포함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뱀도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편이 나았을 사실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알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바로 이런 신뢰까지를 포함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성경에 모두 표현되어 있으리라고 믿으십니까? 성경 66권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들을 모두 담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안에는 담배 피지 말하는 말도 없고 핵무장을 하지 말라는 말도 없습니다. 성경에 써 있지 않다고 해서 담배를 피워도 되고 성경이 금하지 않는다고 해서 핵무장을 해도 된다고 강변한다면 정말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담배를 피고 안 피는 문제나 핵무장을 하고 안 하는 문제는 성경에 써 있는가 여부와 직접 상관이 있지는 않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태도는 성경을 경홀히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믿습니다.

 

                                             8

 이미 글이 하염없이 길어졌지만 마지막으로 죽음과 생명에 대해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도 말씀했지만 사람은 선악과를 먹든 먹지 않든 자연적인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피할 수 없다’고 말하면 이미 거기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지요.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은데 피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맞이한다는 가치 판단 말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표현은 아닌 것 같네요. 우리 속담에 ‘개똥 위에서 굴러도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진실의 한 면만 보고 하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1백 살만 돼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구분이 어려운 것이 보통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모세가 120살이 되어 죽었을 때 아직도 총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적했다는 사실 자체가 보통 사람들은 120살이 되면 총기가 흐려졌다는 뜻이지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그냥 숨만 붙어 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렇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에는 손 하나 까딱 하지 못하고 눈동자조차 돌리지 못하는데 뇌만 살아 있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식물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우린 이런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소설에서는 이 주인공이 수퍼 컴퓨터와 연결되어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보통 식물인간은 의식과 생각이 있다 해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식물인간은 살아 있다 해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제가 그런 상태에 빠진다면 과연 그래도 계속 살아 있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생물학적 죽음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자연적인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해서 비로소 세상에 들어온 ‘이방인’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게다가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도 900년 정도를 더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을 때 그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튼소리를 하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생명 나무 열매도 그것을 먹으면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을 끝없이 이어가게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누렸을 수도 있었던 생명, 그리고 생명 나무 열매를 먹었더라면 누릴 수 있었던 생명은 따라서 자연적인 생명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우리의 텍스트는 이 궁금증도 풀어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생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먼 훗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과 창세기 2-3장의 ‘생명’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요?

이번 글은 질문으로 끝나네요. 기나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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