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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산책
제 목 : 흩어지기 싫어요!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야기)
글번호 : 7    조회 : 1048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06-10-29 04:04:30   
 
“…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세기 11장 4절, 개역 개정판).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銖構?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세기 11장 7절, 개역개정판).

“Then they said, "Come, let us build ourselves a city, and a tower with its top in the heavens, and let us make a name for ourselves, lest we be scattered abroad up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창세기 11장 4절, RSV).

“Come, let us go down, and there confuse their language, that they may not understand one another's speech." (창세기 11장 7절, R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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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그토록 오랜 역사를 살아오면서 발견한 것들 중 가장 위대한 발견은 ‘불’이라고 하고 발명한 것들 중 가장 위대한 발명은 ‘바퀴’라고 합니다. 이건 과학에 문외한인 제 얘기가 아니고 과학자들이 하는 얘기니 믿을 만 하겠지요. 전기나 컴퓨터가 아니라 조금은 의외지만, 그리고 불과 바퀴가 우리 주위에서 매우 널리 쓰이기 때문에 대수로운 것이 아니란 생각도 들지만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발견이고 발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과 바퀴가 인류의 물질생활뿐 아니라 정신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래도 굳이 구분해서 생각해보면 정신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은 ‘언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언어가 없는 생활, 그리고 문자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타국을 여행하는 사람 대부분이 겪는 어려움이 ‘의사소통’의 어려움입니다. 저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도무지 말을 못 알아들어 무척 고생했습니다. 아무리 바다 건너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해도 영어를 학교에서 십 년 이상 배웠는데 그렇게 안 들릴 수 있을까요? 영어도 틀린 것 골라내기 위주로만 배워서 그런지 맞는 말만 쓰는 미국 사람들 (그리고 틀린 말도 맞는 말인 양 자신 있게 쓰는 미국 인접국가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미국에 공부하러 오거나 이민 온 사람들에게는 영어와 관련해서 요절복통할 에피소드를 하나씩은 있을 것입니다. 답답하고 비참한 생각까지 들어 부족한 언어재능도 탓해보고 한국의 잘못된 영어교육도 탓해보았지만 쉬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이민 온지 오래 된 분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위로해줬는데 그 말이 반드시 맞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벌써 여기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영화를 보면 알아듣는 말보다 못 알아듣는 말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이젠 영화 볼 때 자막 읽느라 눈이 고생하지는 않는데 말귀 알아듣느라 귀가 하는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절실하게 누굴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영어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인류가 언제부터 어떻게 언어생활을 시작했을까요?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겠지요. 언어학자들은 주전 3천 년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에 인류가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자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주전 3,100년 경에 수메르어로 쓰여진 문서로서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룩 (Uruk) 이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견을 근거해서 인류 최초니 뭐니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라도 어딘가에서 더 오래된 것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들이 파낸 것보다는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 더 많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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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태고사를 마무리 짓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또한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과 고대 중동의 역사와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성과도 넘쳐 날 정도로 많습니다. 대부분이 비교역사 내지는 비교 종교학적으로 접근하는 이런 연구들이 우리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거기 의존하면 오히려 텍스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료를 참조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역사성 (historicity)을 확인하거나 종교 및 문화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관심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구랏 (zigurrat)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들 합니다. 지구랏은 수메르와 바빌론의 많은 도시들에 있었던 높은 탑 모양의 건축물로서 그 꼭대기에 신전이나 제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종교적 건축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텍스트에는 신전이나 제단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도 간단합니다. 11장 1절에서 4절까지는 탑을 쌓겠다는 인간의 결심과 그 실행에 관한 이야기이고 5절에서 9절까지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 및 그 결과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 (1절)는 말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0장은 지상의 모든 민족이 노아 후손에게서 비롯됐다고 서술하는데 11장 1절은 그들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함으로써 인류의 ‘동질성’ (unity)을 강조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동쪽에서 옮겨오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정착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누군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문맥으로 보아 10장에 서술된 노아의 후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숫자가 얼마나 됐기에 이런 이동이 가능했는지 궁금한데 텍스트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숫자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동쪽’ 으로 이동했다고 했는데 ‘동쪽’ 하면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에덴의 동쪽’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창세기 1-11장에는 ‘동쪽’ 이란 말이 세 번 쓰였습니다. 첫 번째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동쪽’ 에 거룹들과 빙글빙글 도는 라하트 하헤렙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다고 했을 때이고 (3:24), 두 번째는 가인이 아우를 살해한 후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했다고 말할 때 (4:16) 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우리 텍스트인데 이렇게 보면 ‘동쪽’ 이란 말이 세 번 모두 좋지 않은 이야기에 쓰였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심상치 않을 조짐입니다. ‘시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노아의 후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탑을 쌓기로 결정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굽고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해서 높은 탑을 쌓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돌과 진흙을 사용한 건축에 비하면 벽돌과 역청을 사용한 건축이 훨씬 진보된 기술이고 내구성도 뛰어납니다. 벽돌과 역청은 발달된 문명을 상징합니다. 고대인들은 파피루스나 가죽을 사용하기 전에는 흙을 구워 만든 ‘토판’ (tablet)에 글자를 썼습니다. 따라서 벽돌, 토판, 역청 등은 발달된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텍스트의 관심은 그들이 왜, 무엇을 위해서 탑을 만들었는가 하는 데 모아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4절은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고 적고 있습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는 일은 탑을 쌓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은 두 가지, 곧 그들의 이름을 내는 일과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름을 내고 싶어 했는지, 왜 흩어지지 않으려 했는지에 대해서 텍스트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는 텍스트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이런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은 얼마 동안 가만히 지켜보신 후 드디어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한 족속이고 그들의 언어가 하나라는 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곧 그들의 ‘동질성’ (unity) 을 문제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한 줄만 더 읽어보면 문제의 뿌리는 동질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조차 (!) 이를 막을 수 없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려고 하는 일을 마음대로 실행하려면 ‘동질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동질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한 족속이라는 사실과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일행 (7절은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은 하늘로부터 ‘내려가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7절). 그리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비로소 ‘그 도시’ 건설하기를 그쳤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탑’ 을 건축했다고 말하더니 여기서는 ‘도시’ 를 건설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건설했던 것이 탑입니까, 아니면 도시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다입니까? 어떤 학자들은 현재 우리 성경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는 탑의 건축에 관한 이야기와 도시의 건설에 관한 이야기가 혼합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도시를 세우면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으므로 처음 탑을 세우려 했던 목적 (“흩어짐을 면하자.”) 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지요. 탑의 건축이 도시 건설의 일부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네요.

9절은 결론에 해당되는 구절로서 ‘바벨’이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언어가 혼란하게 된 데서 ‘바벨’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혼란해지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바벨’이 아니라 ‘바릴’입니다. ‘바벨’이란 말은 대제국 ‘바빌론’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3

자, 그럼 과연 바벨탑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흩어지다’ 라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흩어지다’ 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푸츠’ 가 아홉 절로 이루어진 짧은 이야기에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4, 8, 9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잦습니다. 사람이 탑을 쌓으려 했던 목적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절).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목적은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8절). 그 결과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졌습니다’ (9절). 이렇듯 중요한 대목에 같은 단어가 사용됐다는 사실은 이 단어가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쓰임새에 따라서 그 의미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단결을 강조한다는 뜻에서는 좋은 말이지만 같은 말을 독재자가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때는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수 특권층의 이해가 마치 전체 공동체의 이해인 것처럼 호도하고,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분열을 조장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억압했던 오랜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흩어지지 않으려는 시도가 하나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사람들이 탑을 쌓아 이루려 했던 목적이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흩어짐을 면하려 했다는 데만 관심하고 계십니다.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름을 날리려는 목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흩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시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으려 했고, 반대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애써 흩으려 하셨을까요?

지금은 도심에 인구가 지나치게 몰려 있고 집값이 비싸서 주거지역이 나날이 외곽으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 나성만 해도 10년 전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지역이 지금은 빽빽한 주택단지로 변해 있고 그곳도 1년이 다르게 집값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요. 신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도시는 팽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사회의 사정은 어땠을까요? 지금과 크게 달랐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왜소하고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주거지가 부족하지도 않았습니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었습니다. 사람이 거주하던 지역은 매우 작았고 넓은 땅이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집단을 이루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었습니다. 흉년이 들거나 가축을 먹이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이동 거리가 멀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큰 규모의 집단을 이루지 않고서는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거주지 이동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흩어지지 않고 뭉치려는 시도는 살아 남기 위한 본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생존본능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좀더 시야를 넓혀서 창세기 1-11장 전체에서 바벨탑 이야기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요즘 생태학자들은 이 구절을 문제로 생각합니다. 이 명령대로 순종하다 보니 인간이 지구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 놓았다고 말입니다.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다 보니 생태계가 파괴됐고 지구 전체가 심각한 오염상태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지요. 생태계 파괴에 이 성경구절이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정확하게 말하면 생태계를 파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소수의 기업가들과 이를 방조해온 권력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단 말입니까? 정말 인류는 그 정도로 열심히 성경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생태계 파괴의 책임을 엉뚱하게 성경 말씀에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복하라느니 다스리라느니 하는 말의 뜻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마음대로 지배하고 남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청지기처럼 잘 보살피라는 뜻임을 성경 학자들이 아무리 강조해도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웬 성경 말씀 탓? 

저는 텍스트의 힘, 특히 성경 같이 권위를 인정 받는 텍스트의 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성경이외에 권위를 인정 받는 다른 텍스트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텍스트가 진공상태에서 스스로 힘을 발휘하지는 않습니다.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텍스트는 사실상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28절 말씀도 생태계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심각하게 ‘남용’되어 왔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렇게 된 것은 말씀 그 자체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말씀의 의미에 대한 무지와 이를 삶에 바르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의 태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역설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성취됐습니다. 그리고 홍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됐으나 이와 더불어 죄악도 번성하여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됐습니다 (창세기 6:5). 이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 이야기는 지난 번 글에서 다뤘습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이야기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진 이야기 (창세기 9:19)가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창세기 10장에는 그렇게 퍼진 노아의 후손들의 족보가 들어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창세기 1-11장을 관통하는 주제들 중 하나가 바로 히브리어 ‘푸츠’ 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인류의 흩어짐’ 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어 흩어지지 않으려고 탑을 쌓는 인간의 시도와 이를 좌절시켜 기어코 인간을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일차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사실상 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탑의 건축은 이야기의 소재에 불과하고 주제는 ‘인간의 흩어짐과 공동체의 형성’ 인 것입니다. 텍스트가 처음에는 ‘탑’ 의 건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9절에 가서는 ‘도시’ 의 건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는 데서도 텍스트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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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져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로써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흩어지라는 명령이 곧 공동체를 이루지 말고 개별적으로 홀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는 대체로 좋은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정이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지옥 못지않은 가정도 있고, 교회가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분쟁이 생기면 지옥 저리 가라 할 정도가 되는 예도 많이 봤습니다. 대화보다는 강압이 앞서고 양보와 희생보다는 이해관계가 앞 자리를 차지하는 집단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세워야 할까요? 공동체를 만드는 데 반드시 갖춰야 할 원칙 같은 것이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우리 텍스트는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흩어지라’ 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시날에 탑을 쌓고 거기 영구히 머무르려 했습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견고한 탑을 세우려 했습니다 (3절).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시도였습니다. 그들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바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가 재발한 것입니다. 한계 없는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 ‘성스러운 천막’ (sacred canopy, 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쓴 종교사회학 책의 제목) 을 쳐놓고 그 안에서 제한 없는 자유를 만끽하려는 인간의 모습…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시도를 공동체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인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써 좌절시키고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이는 공동체 세우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흩어져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받들어 실행하는 공동체를 제대로 세워보라는 뜻으로 저는 읽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동체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이 공동체를 떠받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창세기 12장 이하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전개됩니다. 바벨탑 이야기를 태고사와 이스라엘 족장사를 잊는 가교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뱀 꼬리처럼 붙이고 얘기를 끝내겠습니다. 첫째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야기는 바벨탑 이야기를 뒤집는 이야기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는데 성령강림 이야기에서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는 언어를 “알아듣게” 만드셨습니다. 언로가 뚫린 것입니다. 이로써 성령 강림으로 참된 의미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 기초가 확보되었습니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의 말을 듣는 겁니까? 귀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이 접수되어 뇌가 그 내용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남의 말을 듣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을 주실 때 “들어라, 이스라엘아!” 라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쉐마 이스라엘!” 이란 말을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같은 동사가 우리 텍스트 7절 (“알아 듣지 못하게 하자”) 에 쓰였습니다. 이때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감각적 수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말이 가져올 새로운 현실에 자신을 열고 스스로 변화될 준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언어들 중 보다, 듣다, 말하다, 알다 등 감각 및 인식과 관련된 동사들은 매우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듣다’ 라는 동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창세기 1-11장에서 제기된 여러 주제들은 11장에서 종료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재등장하면서 심화되고 발전됩니다. 다음 번에는 아브라함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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