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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7월 8일 "침묵하는 하느님과 어떻게 소통할까?"(시편과 영화 5)
글번호 : 768    조회 : 67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7-18 08:07:15   
 
2018년 7월 8일 / 성령강림절 여덟 번째 주일
시편과 영화 5

침묵하는 하느님과 어떻게 소통할까?
시편 13:1-6

곽건용 목사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3 나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4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5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시편 13:1-6).

이들은 대체 왜 왔을까?

사이언스 픽션 영화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와 등장하지 않는 영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분류하지는 않고 그저 제 맘대로 한 분류법입니다. 그리고 외계인이 등장하는 사이언스 픽션 영화는 그들이 폭력적으로 지구를 공격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제 멋대로의 분인데 대부분은 전자에 속합니다. 후자에 속하는 영화는 많지 않은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미지와의 조우 Close Encounter of the Third Kind> 정도가 거기 속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이언스 픽션 영화는 ‘사이언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비과학적인 오락영화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공부를 하고 봐야 할 정도로 묵직한 것들이 가끔 있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봤다가는 무슨 얘기를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그걸 본 다음에 공부를 하고 다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얘기할 <컨택트>가 그런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중심으로 얘기를 전개하는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그 동안 나온 사이언스 픽션 영화들 중에, 나아가서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영화들 중에 언어와 사고의 관계라는 주제를 이만큼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다룬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시간의 제약 때문에 영화 얘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느 날 외계에서 열두 개의 비행물체가 지구 곳곳에 도착합니다. 세계가 발칵 뒤집히죠. 이에 미국 정부는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을 불러서 외계인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우선 알아내야 할 것은 이들이 지구에 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온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당연히 있습니다. 영화 첫머리에 루이스가 자기를 데리러 온 대령에게 다른 언어학자를 만나면 ‘무기’(武器)가 산스크리트어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라고 말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격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이지요. 좌우간 그들이 왜 왔는지 알아내는 데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열다섯 시간입니다.

영화는 내내 루이스와 이안 팀이 외계인과 대화를 시도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병에 걸려 죽는 루이스의 딸 한나 이야기가 녹아들어가 있고 외계인 언어의 모양이 갖고 있는 심오한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있습니다. 이 모두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영화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얘기들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소통’이라는 주제 하나만 갖고 얘기하려 합니다. 에서는 외계인이 지구인의 언어를 배워서 초보적인 수준으로나마 소통이 이뤄집니다. <컨택트>에서는 반대로 소통하기 위해서 지구인이 외계인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영화는 인류가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전혀 다른 체계를 갖고 있는 외계인의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

세계 어디를 가든 이민자들은 언어의 문제를 겪습니다. 이민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언어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성인이 되어 이민한 사람들에게 언어의 문제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벌써 이민 온지 25년째인데 아직도 영어가 불편하기만 합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민의 기간과 노력의 정도에 비례해서 결국은 이민 간 지역의 언어를 배웁니다. 얼마나 원활하게 소통하는지는 각자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통을 합니다. 또 언어 이외에도 몸 언어(바디 랭귀지)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소통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의 언어가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외계인의 언어는 인류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루이스가 그 언어를 이해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겁니다. 제가 시편 13편을 오늘의 본문으로 정하면서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하느님의 언어도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사람의 언어와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 왜 사람과 하느님이 소통이 안 된다는 거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과 쉽고 자연스럽게 소통합니까?

오늘 읽은 시편 13편은 불평하는 시편입니다. 시인이 하느님을 향해서 불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께 불평한다.’는 말이 낯선 분도 있겠지만 사실 150편의 시편들 가운데는 하느님에게 불평하는 내용의 시편이 적지 않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시인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두고 하느님에게 하소연합니다. 시인은 ‘언제까지?’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면서 자기가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을 하소연합니다.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크게 잘못됐음에 분명합니다. 시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일이 벌어졌음에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까지 지기를 잊으시겠냐고, 언제까지 자기를 외면하시겠냐고, 언제까지 자기가 이 아픔을 견뎌야 하느냐고 시인이 외쳤을 리 없습니다. 그가 겪는 이 아픔은 혼자서 실존적으로 겪는 종류의 아픔과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군지 모르지만 ‘원수’라고 불리는 자에게서 비롯됐습니다. 시인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 때문에 그는 괴롭습니다. 하지만 원초적으로 이 모든 일은하느님의 망각과 외면에 원인이 있습니다. 시인이 극도의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 하느님이 무책임하게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무책임한 부재(irresponsible absence)가 시인이 겪는 모든 괴로움의 궁극적인 원인이란 얘기입니다. 이를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기에 이렇게 호소합니다.

나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느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여기까지는 시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모종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는 그거 원수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비롯됐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시인의 호소를 외면합니다. 시인은 하느님이 자신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갖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하느님이시여, 내 기도를 응답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5절에 이르면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이 시편도 마지막 부분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바로 앞 3절과 4절에서는 제발 자기를 굽어 살펴봐달라고, 응답해 달라고,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눈을 뜨게 해달라고, 원수가 자기를 이겼다고 으스대면 어떻게 하냐고 투정을 부린다 할 정도로 간절히 애원하더니 5절에서는 갑자기 자기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한다고 노래랍니다. 그가 주님을 ‘한결같이’ 의지했다면 바로 앞에서 불평과 탄원은 왜 했던 겁니까.

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여기서도 뭔 일이 생겼음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급격하게 태도가 달라지게 만은 모종의 사건이 생겼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습니다. 문제는 왜, 무엇 때문에 시인의 태도가 불평과 하소연에서 기쁨의 찬양으로 돌변했느냐는 겁니다. 학자들은 4절과 5절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투정과 하소연에서 곧바로 찬양으로 넘어가지는 않았고 꽤 시간이 걸렸을 거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시간의 흘렀다고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4절과 5절 사이에 시인에게 중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게 뭔지 시인은 침묵하지만 말입니다. 불평을 찬양으로 바꾼 게 과연 뭘까요?

제가 구약성서를 공부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 아주 보수적인 신학교에 가서 보고 놀란 게 있는데 그것은 거기 학생들은 대개는 자기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를 직접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다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얘기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제대로 온 건가?’ 반신반의하던 제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런 음성을 들은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왜 나는 그런 음성을 못 들었을까? 왜 내게는 그런 음성이 들리지 않는 걸까? 왜 하느님은 그렇게 분명히 나를 부르시지 않을까? 혹시 내가 잘못 온 건 아닌가? 이런 의심을 하고 있던 차에 다른 학생들은 그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어서 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제게도 확실한 부름의 음성을 들려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제게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안 되면 무슨 방법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부’를 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세를 비롯해서 엘리야, 엘리사, 나단,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 등등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자가 됐다는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구약성서에 흥미를 갖게 됐고 그쪽으로 공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법 긴 세월 동안 구약성서를 공부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그들 역시 직접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이 말씀이 공기를 흔들고 파장을 만들어서 사람의 고막을 떨게 해서 그 감각이 뇌에 전달되어 소리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얘기하려면 길지만 오늘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나?

영화에서 루이스와 이안 팀은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반성한 점은,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큼 노력하고 있나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일이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는 지는 것처럼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한 뼘도 안 되는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알기 어렵거늘 깊고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마음은 어찌 그리 쉽게 알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왔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당장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있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 성서가 그렇게 이해하기 쉽더냐고 말입니다. 성서가 그렇게 이해하기 쉽다면 왜 수많은 성서학자들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성서를 연구하고 앉아 있겠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짧고 간단한 말씀이 그렇게 쉽게 이해됩디까?

시인은 언제까지 자기를 잊으시겠냐고, 언제까지 자기를 외면하시겠냐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데 사실은 하느님이 시인을 잊거나 외면하신 게 아니라 하느님은 계속해서 시인에게 당신의 언어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시인이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하기 못해서 놓치고서는 자기를 외면하신다고, 망각하셨다고 불평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하느님의 언어의 구조는 우리 사람의 언어의 구조와 크게 달라서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데 사람은 그걸 모르고 하느님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왔으므로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크게 오해한 게 아닌가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성소수자에게 직접 듣는 세미나를 갖습니다. 저는 이곳저곳에서 동성애자들을 반대한다, 그들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왜 그들을 반대하냐고 묻곤 하지요. 그러면 그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 반대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냐고 반문하지요. 그러면 그들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그럼 당신은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하는 거냐, 정말 그러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대답하지요. 그럼 저는 두 가지 이유로 당신은 틀렸다, 왜냐하면 성경은 레즈비언을 반대하지는 않는데 당신은 그들도 동성애자라고 반대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틀렸고, 또 하나는 성경을 동성애자를 반대만 하라 하는 게 아니라 죽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니 당신은 당신 말대로 성경이 명하는 대로 행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저는 동성애자를 죽이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른바 성경이 명령하니까 동성애자를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성경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란 점을 강조할 따름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분명히 동성애자들을 죽이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적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동성애에 대한 하느님의 명령에 충실만 만큼 그 외의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서도 충실하냐고 말입니다. 동성애자들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 말을 인정한다고 쳐도 정말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동성애자들보다 더 심하게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자들이 없습니까? 하늘을 오염시키고 땅을 망가뜨리며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거대한 환경파괴기업들에 대해 동성애 반대자들이 나서서 시위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분 있습니까? 동성애자들더러 생명의 존중 운운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무기제조회사들과 군산복합체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폭격을 해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동성애 반대자들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기업과 불의한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그것을 금지하는 입법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생명 존중? 어떻게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가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자에 대한 얘기는 우선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것을 시간의 간격을 무시하고 글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지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약성서의 동성애에 관한 계명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그것을 하느님의 계명으로 이해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 이해가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저는 저버리지 못합니다. 예컨대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사건에서도 문제가 되는 점은 동성애가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나그네를 환대하기는커녕 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 하느님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하느님의 뜻을 동성애 반대로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언어구조는 우리의 그것과 달라서 그걸 제대로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당연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을 뜻을 전달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에게 그런 의무가 있나요? 하느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그런 의무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왜 우리가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탐구하고 배우고 실험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까요? 어두운 빛이 없는 곳에서 동전을 잃어버렸으면 아무리 어두워도 잃어버린 데서 찾으려 해야 합니다. 그곳이 어둡다고 해서 동전을 잃어버리지도 않은 밝을 곳을 뒤진다면 천 년을 찾아도 동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언어의 구조가 사람의 그것과 달라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도 그걸 알려면 그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영화에서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이해하는 방법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우선은 하느님의 언어구조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화에서 루이스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외계인의 언어에는 인간의 철학과는 다른 철학이 표현되어 있음을 파악합니다.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딸 한나가 불치병에 걸려서 결국 죽게 될 걸 미리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우리 인간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계시는 분이므로 낮은 차원의 우리 언어를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을 테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낮은 차원에 존재하는 우리는 높은 차원에 계시는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극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이해하려는 작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공동으로 힘을 합쳐야 겨우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영화에서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전문가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의 전문가라는 게 고작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일 따름 아닙니까.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할 겁니다. 인류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는 인종, 종교, 문화, 피부색 등의 차이는 존재할 수 없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이해하는 길은 책상머리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실험과 깨달음과 실천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언어구조를 파악하는 길을 찾았다면 그걸 실험해보고 그 결과는 성찰한 다음에 거기에 맞는 실천을 해본 다음에 다시금 새로운 실험을 하는 순환의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점차 하느님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3편의 시인도 4절과 5절 사이에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랬기에 그토록 180도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오늘은 자신을 잊으시고 외면하신다고 불평하는 시편 13편과 영화 <컨택트>를 연결해서 하느님의 언어구조와 우리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본래는 오늘로서 <시편과 영화의 만남> 시리즈 설교를 마치려고 했는데 꼭 얘기하고 싶은 영화가 하나 더 있어서 한 주일만 연장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저 유명한 시편 23편과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다루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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