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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7월 22일 "나그네, 이민자, 난민, 우리는 누구?"
글번호 : 770    조회 : 62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8-29 21:40:09   
 
2018년 7월 22일 / 성령강림절 열 번째 주일

나그네 이민자 난민, 우리는 누구?
신명기 10:19 베드로전서 1:17

곽건용 목사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신명기 10:19).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베드로전서 1:17).

한국사회에서의 난민

오늘은 요즘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난민’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1951년에 만들어진 UN의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1조의 난민 규정에 따르면 난민은 “인종, 종교, 민족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 때문에 국적국(자기 나라)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로 정의됩니다.

전쟁을 경험한 우리 겨레에게는 ‘난민’보다는 ‘피난민(避難民)’이란 말이 더 익숙한데 언젠가부터 ‘피한다’는 뜻의 ‘피’(避) 자를 빼고 ‘난민(難民)’이라는 애매한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난을 피해온 사람’이라는 분명한 의미가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난민은 사회상황이나 역사적 경험과는 무관하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위험한 외국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민은 국가나 민족 단위의 재난, 전쟁, 분쟁의 결과이고 정치적 폭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최근 고국의 제주도에 들어온 약 5백 명 정도의 예맨 난민들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이들은 위험한 아랍 회교도들이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이제 한국도 난민을 품을만한 수준이 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이들 때문에 범죄가 증가하고 테러의 불안에 시달릴 것이며 일자리를 빼앗기고 세금과 복지 부담이 늘어날 것이기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정도는 그나마 따져볼만한 주장입니다. 회교도들에게는 강간문화가 있다느니 여성을 함부로 대한다느니 대다수가 테러리스트라느니 등의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전쟁과 박해로 인해 발생한 강제이주민은 6,850만 명인데 이는 2010년 아랍의 봄 이후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숫자랍니다. 한국에도 난민 신청자가 빠르게 증가합니다. 한국정부는 1994년부터 난민신청을 받았는데 첫해부터 2013년까지 20년간 누적 난민신청자는 5,580명이었는데 2016년에는 7,541명, 2017년에는 9,942명이었고 올해는 5월까지 7,737명에 달한다니 올해 1만 명이 넘을 것은 확연합니다. 해마다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난민 인정률은 4.1%로서 전 세계 평균 24.1%의 1/6 수준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통계만 보면 한국의 난민은 유럽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고 인정률도 낮아서 사회문제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인데 왜 이 문제가 그토록 뜨거운 쟁점이 됐을까요? 순수한 난민문제가 아니라 다른 의도로 이 문제를 부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먼 곳까지 선교도 가면서 온 사람들은 내쫓아야 한다고?

보수개신교인들은 예맨 난민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주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그 먼 곳까지 가서 선교하는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대체 왜 이럴까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선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 내쫓으려 하는가 말입니다. 그 주장의 신앙적, 신학적인 근거나 이유가 뭔지 알고 싶습니다.

동성애 반대 기독교인들은 나름의 성서적 근거를 내세웁니다. 동성애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레위기 20장 13절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얘기했으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보수기독교인들은 뭐든지 성서적 근거 들기를 좋아하니 이 경우에는 어떤 성서적, 신학적 근거를 끌어들이는지가 궁금해서 애써 찾아봤는데 안타깝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수기독교인들 역시 범죄 증가와 테러의 불안, 일자리와 세금이나 복지 부담 등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를 들지 않았습니다. 굳이 들자면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이면 한국이 이슬람화 되고 기독교의 세력이 약화된다는 주장이 고작입니다. 저는 이 주장을 읽고 허탈했슨비다. 고작 들 수 있는 이유가 이것뿐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한국에 난민으로 오는 소수의 회교도 때문에 대한민국이 이슬람 국가가 된다면 회교는 정말 훌륭한 종교임에 분명합니다. 그 정도로 좋은 종교라면 우리 모두 회교를 믿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또한 소수의 회교도들 때문에 약화될 기독교라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겠지요. 한국개신교는 1970년대부터 40년 이상 ‘민족복음화’를 내세웠지만 아직도 민족이 복음화 되기는커녕 기독교인 숫자가 해마다 줄어듭니다. 그런데 개신교가 이루지 못한 걸 이슬람이 해낸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대한민국이 이슬람화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입에서 나온다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제발 말이 되는 얘기를 하기 바랍니다.

난민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는데 타당한 이유를 들어야 한다면 그것 자체가 슬픈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난파당한 사람을 구조하는데 무슨 이유나 논리가 필요합니까.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 피부색이 어떤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지를 따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난파해 표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를 따져보는 게 옳습니까? 그런 것은 일단 구해놓고 따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렇습니까.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인성과 보편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만한 행동을 하는데 신앙적, 신학적 근거를 내놓으라는 것은 불필요하거니와 옳지 않은 짓입니다. ‘What would Jesus do?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좋은 질문입니다. 때로는 이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인성과 양심만 갖고 있다면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예수라면…….’이라고 고민한다면 참으로 딱한 일 아닙니까. 매사에 이렇게 묻는 사람은 그게 하기 싫어서 예수나 부처를 끌어들이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하느님의 뜻이 뭔지 너무도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걸 붙잡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기 싫은 거죠. 이 사실을 깨닫는 것도 신앙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난민을 도와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따지는 순간에도 난민들은 고통을 겪고 있고 심지어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우리가 한 것처럼 난민 돕는 것은 보통의 인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따지는 동안에도 난민들은 고통당하고 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작 난민에게는 일분일초가 아쉽고 절실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이유가 다들 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다르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말이지요?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왜 행복한지 이유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지금 행복한데 그 이유를 뭐 하러 따져 묻겠습니까. 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불행한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 그 이유를 없애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우리처럼 난민 아닌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예멘이나 그 밖의 지역 출신 난민이라면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묻지 않아도 괜찮지만 난민들은 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하고 또한 자신도 행복할 자격과 권리가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뜻으로 성서는 난민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왜 우리는 난민을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성서는 난민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

예수님이 난민들을 어떻게 대하셨을지에 대해서는 얘기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난민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을 만난 얘기는 복음서에 없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배제됐던 이방인들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난민도 어떻게 대하셨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는 말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나, 요한복음 4장이 전하는 수가 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했던 이방 여인과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예수님은 ‘나그네’ 한 사람을 돌봐준 것이 곧 당신을 돌봐준 것이라고도 말씀했습니다.

‘나그네’ 얘기가 나왔으니 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구약성서가 ‘나그네’라고 부른 사람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유행가의 나그네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비(非)이스라엘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왜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서 그들과 함께 살았을까요? 그 점이 궁금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대대로 ‘순혈주의’ 전통이 강한 종족으로서 외부인에 대한 경계와 차별이 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그네’ 또는 ‘거류민’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습니다. 이민자였을까요, 아니면 ‘난민’이었을까요? 어느 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도 한때는 나그네/이민자/난민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그네/이민자/난민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한때는 난민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난민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한때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라.”고 하느님이 그렇게 자주 말씀했겠지요. 이스라엘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하다가 야훼 하느님에 의해 해방된 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말 그대로 난민으로서 유랑하며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이들은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짧은 기간 내에 가나안에 살던 일곱 종족들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 긴 세월 동안 기존 종족들과 갈등하며 공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일곱 종족은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라 제국에 의해 점령됐을 때까지 어느 종족 하나도 멸망당해 사라지지 않고 줄곧 공존하고 갈등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종족도 가나안 땅을 독점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다윗, 솔로몬 시대가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였지만 그때도 가나안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내 일종의 거류민/나그네/난민으로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6세기 초에 바빌론에게 멸망당해 완전히 난민이 됐습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이스라엘은 매우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기들만 잘났다는 선민의식에 가득 찬, 한 마디로 말해서 ‘밥맛없는’ 종족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아는 사람치고 이를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저도 그런 이스라엘이 밥맛없어 편들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지만 그들이 자기들 역사 내내 난민이었음은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나마 좀 덜 미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땅은 하느님의 것으로 믿었습니다. 자기들은 모두 하느님의 것인 땅에 잠시 세 들어 사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땅이 하느님의 것이란 믿음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고백이 기존의 종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후발주자로 들어와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이 차마 그 땅이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지는 못하니까 붙들고 늘어졌던 주장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누가 뭐라 해도 ‘지금’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짓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왜 우리 고국에 왔을까?

‘난민’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인터넷의 발달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요즘이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가짜뉴스가 판을 쳐서 정확한 정보 얻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렇다면 믿을만한 매체를 잘 골라서 거기서 얻는 정보를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뉴스도 골라가며 봐야 하고 언론매체도 잘 선택해야 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카톡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 돌아다니는 온갖 거짓뉴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상당히 신뢰하는 한 기독교 언론매체는 회교도들을 대상으로 30년 넘게 사역해 온 어떤 선교사가 두 주일 전에 서울에서 열린 예장합동의 ‘총회 이슬람 대책 아카데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합니다. 저는 이 교단이 ‘예장합동’이라서 놀랐고 그 내용에 두 번 놀랐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무슬림을 오도록 허락하셨는지 생각해야 한다. 난민을 (제주도로) 부른 건 하나님이다. 그 자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난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난민 중 테러범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할 찬스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는 도와줘야 한다……. 성경은 '나그네였던 때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도와줘야 한다. 기독교인은 자유를 찾아온 난민들, 전쟁의 고아들을 사랑해야 한다. 설령 그 속에 테러리스트가 있더라도 말이다.

또 13년 이상 인도네시아에서 선교활동 중인 한 선교사는 ‘이슬람 포비아’ 현상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슬람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느니 “무슬림 유학생들이 포교를 위한 목적으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느니 “‘CIA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이슬람 인구가 20% 넘으면 폭동과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100%에 이르면 인종 청소와 대학살이 시작된다”느니 하는 자극적인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선교사는 이들 모두가 근거 없는 가짜 뉴스로서 이런 것들이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무슬림과 얼마든지 우정을 나눌 수 있고, 전도도 가능하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회교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10년 이상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한 얘기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미국 군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일으켜도 언론은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보다 못 사는 국적의 사람이 범죄를 일으키면 언론은 벌 떼처럼 공격한다. 이런 현상은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일 수도 있다. 우리보다 못 살면 무시해도 된다는 태도가 기저에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는 1970~80년대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중동, 독일에서 일했다. 무시와 멸시를 받았다. 같은 처지에서 난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원인을 무슬림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다른 말에도 다 동의하지만 “미국 군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일으켜도…….”라는 첫 마디가 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헛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불교만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무상한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 무엇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나 제주도에 들어와 있는 5백 명의 예맨 난민들이나 이 나라 남쪽 국경을 넘는 중남미 사람들이나 모두 한 치의 다를 바 없는 인생의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와 이민자와 난민은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최희준의 노래에 등장하는 ‘나그네’와 다르다는 앞의 제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론가 가는 도중에 잠시 이 지구에 머물러 있는 나그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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