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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7월 29일 "꽃도 십자가도 없는 죽음"
글번호 : 771    조회 : 59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8-29 21:41:09   
 
2018년 7월 29일 / 성령강림절 열한 번째 주일

꽃도 십자가도 없는 죽음
마가 16:1-8

곽건용 목사

1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5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6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7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8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마가 16:1-8)

기억을 믿지 말았어야

이미 자기의 기억력을 신뢰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 자꾸 잊어버립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오래 전에 읽었던 클로드 모르강(Claude Morgan)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따오려 했습니다. 저는 그게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꽃도 십자가도 없는 죽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더군요. 아차 해서 고칠까 생각하다가 ‘그게 뭐 대단한 일인가. 무덤이나 죽음이나…….’ 싶어서 그대로 뒀습니다.

이 소설은 나치 치하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한 프랑스인 교사가 레지스탕스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막바지, 독일의 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주인공 장은 거기서 절친 자크를 만납니다. 장은 자크가 자기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음다는 사실을 알고 놀랍니다. 게다가 자기와는 일상적인 얘기만을 주고받는 아내 클레르가 자크와는 인생과 예술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내의 처녀 때 사진까지 자크가 갖고 있는 걸 알고 질투를 느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장은 점차 자크의 철학과 인생관에 감화를 받게 됐고 왜 나치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하는지, 사랑은 뭐고 자유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병으로 풀려난 후 레지스탕스가 됩니다.

지난 일요일 저녁 이후 한 주간의 삶

지난 일요일 저녁, 날이 하도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두 사람 밖에 없는 집에 에어컨을 틀기가 뭐해서 가까운 카페에 나가서 책을 읽고 있다가 노회찬 의원 소식을 급보도 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짜 뉴스로 생각했는데 곧 상세한 소식이 올라왔고 그게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페이스북에 “명복이 빌어지지 않는다.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화가 난다. 뭣들 하고 있었나 싶다. 나부터……. ㅠㅠ”라고 쓴 후에 한 동안 뭐든 손에 잡히지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온 손님이 있어 그는 만났지만 정신은 딴 데 가 있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페이스북에 쓴 대로 슬프지도 않았고 명복을 빌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화가 났습니다. 그를 죽게 한 세상에 화가 났고 그런 일을 눈곱만큼도 예상해보지 않았던 저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하나둘 씩 죽어나가면 나중에는 나쁜 놈들만 남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 주간 내내 그냥 화가 나서 일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날은 왜 그리 더운지 불쾌지수가 더 높아질 수 없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자꾸만 멍해졌습니다. 이런 현상에 9년 전인 2009년 5월에도 있긴 했습니다. 노 의원과 같은 성(姓)을 가진 분의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말입니다.

그래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드라마를 하나 봤습니다. 의외의 선택이지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드라마라니!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드라마에 대한 기사를 봤습니다. 현직 판사가 대본을 썼다는 기사 말입니다. 그때는 ‘판사가 그렇게 한가한가? 드라마를 쓸 정도로?’ 하는 생각을 했는데 기사를 보니 현재 사법부의 현실을 잘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전 같으면 이 정도면 저는 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찾아서 그 드라마의 부분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 클립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글자 그대로는 아니지만 요지는 이랬습니다. “저는 저 하나 지키려고 판사가 됐어요. 그런데 기록을 읽다 보니까 사람이 보이더군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렸더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더라

저는 현직 판사가 대본을 썼다는 사실과 이 대사 때문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가 그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요즘 한국의 사법부 현실을 생각하면 판타지 같은 드라마입니다. 법원에 정말 저런 판사가 어디 있나,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몇 명쯤은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노 의원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저로 하여금 이 드라마를 보게 만들었던 장면을 생각하면서 한 사람의 성서 연구자로서의 제 삶을 돌아봤습니다. 언젠가 말씀했듯이 저는 남들은 그렇게 많이 듣는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정말 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는지가 궁금해서, 그걸 알고 싶어서 구약성서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구약성서를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며 설교하면서 들으려 했던 게 바로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알고 깨달았습니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따옴표를 달아 인용한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런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 공기를 진동해서 예언자의 고막을 울려 그의 뇌로 전달된 소리(sound)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보겠다고 기도하며 읽고 또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게 있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보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읽고 또 읽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데 언제부터인지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사람의 목소리 말입니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목소리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파트너로 인정받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이 말은 100% 순도의 사실은 아닙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지 성서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저는 그것이 제가 찾는 목소리, 제가 들으려는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소리라 들릴 때면 ‘이건 아니지. 내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 목소리를 제쳐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드라마의 클립 하나를 보고 나서 제가 성서를 읽고 연구하면서 들었던 사람의 목소리가 제쳐놓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목소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자리는 그렇게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느끼고 깨달은 자리입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지난 한 주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제 생각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노 의원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계속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잔치국수’니 ‘이중인격’이니 하는 인간 이하의 언급들은 제외하더라도 ‘자살’이 죄라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정신 나간 얘기들을 읽으면서 참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그 분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래 고작 할 얘기가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같은 얘기 밖에는 할 얘기가 없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자기가 죽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런 죽음도 넓은 의미에서 자살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원 받지 못할 자살을 조장하신 분이 아닙니까. 제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생각 좀 하면서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노 의원은 자기가 드루킹에게 돈을 받은 게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지요. 그는 정말 자기가 저지른 작은 잘못에 책임지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걸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유서에서도 그런 뜻을 밝혔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정말 전부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살 당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죽음에 의문스런 점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타살 당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돈 문제보다는 더 큰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해왔습니다. 혹시 그분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같은 음성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는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지난 주중에 강남순 교수님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었습니다. 노 의원의 죽음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강 교수님은 2004년에 죽은 자크 데리다를 추모하려고 52일 동안 매일 데리다에 대한 단상을 적은 션 가스톤이란 철학자를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했습니다. 강 교수님은 “나는 애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사유의 주체일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감’을 보여주는 애도의 주체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서 우리의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흔히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하는 그것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저는 강 교수님의 글을 읽고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애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를 제대로 애도하는 것일까요? 그 동안 우리가 예수에 대한 신앙이라고 믿고 해온 일들이 과연 정말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이고 예수를 바르게 애도하는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을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했고 그분께 찬양했고 돈이 됐든 시간이 됐든 생명이 됐든, 뭐가 됐든 그분에게 뭔가를 바쳐왔습니다. 이것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바, 예수를 믿는 방법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녕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그런 것들일까요?

노 의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의 뒤를 따르겠다고,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더군요. 저는 예수님을 애도하는 길,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길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의 하느님으로서의 위상 따위를 수호하려고 애쓰지 말고(과연 예수님이 그런 걸 바라셨겠습니까!), 구약성서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땀 흘리지 말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써 예수님을 제대로 애도합시다. 우리는 애도함으로써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는 애도함으로써 신앙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애도는 곧 그분이 하셨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더 이상 꽃도 십자가도 없는 죽음이 아니게 될 겁니다.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십자가와 꽃을 예수님의 무덤에서 보게 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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