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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향린강단
제 목 : 2018년 9월 16일 "뽑고 허물고 세우고 심어라?"(예레미야 1)
글번호 : 776    조회 : 96    작성자 : goodneighborhood    작성일 : 2018-09-20 19:23:50   
 
2018년 9월 16일 / 성령강림절 열여덟 번째 주일
예레미야 1

뽑고 허물고 세우고 심어라?
예레미야 1:1-10

곽건용 목사

1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예레미야가 한 말이다. 그는 베냐민 땅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출신인 힐기야의 아들이다. 2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린 지 십삼 년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3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유다 왕으로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 뒤에도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 제 십일 년까지 주님께서 그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다. 시드기야 왕 십일 년, 그 해 다섯째 달에 예루살렘 주민이 포로로 잡혀 갔다. 4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5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7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8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9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예레미야 1:1-10)

사람과 로봇의 경계
근래에 나온 과학영화 중에서 제 관심을 끄는 분야는 사람과 인조인간 사이의 경계를 묻는 영화들입니다. 오래 전에 나왔고 최근에 속편이 나온 <블레이드 러너>가 그랬고 몇 년 전에 나온 <엑스 마키나 Ex Machina>와 <허 Her>가 그런 종류였습니다. <엑스 마키나>는 한 거부(巨富)가 인조인간을 만들어 외진 곳에 가둬놓고 사람 하나를 불러다가 인조인간이 얼마나 사람 같은지, 사람과 감정까지도 소통하는지를 실험하다가 인조인간에게 속아서 그 거부는 죽고 실험의 상대방이었던 사람은 인조인간이 그랬던 것처럼 갇힌 반면 인조인간은 유유히 탈출해서 그녀가 인조인간인지 아무도 모르는 인간세상으로 나간다는 영화입니다. <허>는 남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한 남자가 여성 캐릭터의 컴퓨터와 대화만으로 사랑을 나누는 얘기입니다. 그 사랑도 실패로 돌아가는데 그 연유는 스포일러가 되니 여기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부터 여섯 번 구약성서 예언서 가운데 하나인 ‘예레미야서’를 갖고 설교하려 합니다. 이 책은 무려 52장이나 되는 큰 책이고 카버라는 기간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그대로 따른다면 기원전 626년경부터 585년경까지 41년이나 됩니다. 이런 큰 책을 여섯 번의 설교로 다 다룰 수는 없으니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서가 다루는 여러 주제들 중에서 몇 가지만 선택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제가 가장 많이, 가장 깊이 있게 공부한 책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책을 제대로 다룬 적이 없습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레위기까지 다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직무유기’를 범했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이번에 제한적이지만 제대로 다뤄보려는 겁니다.

이번에 예레미야를 다루기로 작정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란 말을 쓰는데 이 경우가 거기 해당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가 떠올라서 보기 시작했는데 저는 첫 부분에서 충격을 받아서 보기를 중지했습니다. 는 사람과 인조인간의 경계를 묻는 영화들 중에서도 초창기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트럼프는 그게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억지로 주장하지만 지구가 온실효과 때문에 더워져서 빙하가 녹아내려 해변에 위치한 많은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 자원이 고갈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대국은 개발도상국에 대해 엄격한 산아제한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절실하게 필요해진 것이 자원을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로봇이었습니다. 이에 인류의 과학은 사람처럼 반응하는 로봇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과 똑같이 관절을 움직일 수 있고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할 줄 아는 로봇, 심지어 사랑할 줄도 아는 로봇을 만든 겁니다. 사람과 섹스를 할 수 있는 로봇이 아니라 감정을 나누며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청중들은 놀랍니다. 경이로운 일 아닙니까. 그런 로봇을 만든 과학자는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듯이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어린아이 로봇을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묻습니다. 그 로봇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데 그렇다면 사람도 그 로봇을 사랑하겠느냐고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어린아이 로봇의 사랑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랑을 할 수 있겠냐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영화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중단했습니다. 한 청중의 질문이 가슴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예레미야가 떠올랐습니다. 왜 그때 그가 떠올랐는지는 앞으로 설교를 듣다보면 여러분 스스로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예레미야를 설교할 결심을 굳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더니 바로 그 날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시 한 편을 읽게 됐습니다.

아이한테 물었다
이담에 나 죽으면 찾아와 울어줄 거지?
대답 대신 아이는 눈물 고인 두 눈을 보여주었다(나태주, ‘꽃그늘’)

이 짧은 시는 제가 예레미야를 이해하는 방식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아, 이건 하느님이 예레미야를 설교하라고 나를 이끄시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예레미야를 갖고 설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매우 어려운 책

예레미야서는 참 어려운 책입니다. 예언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제일 어려운 책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앞에서 얘기했듯이 분량도 많고 커버하는 기간도 깁니다. 게다가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뒷부분에 가서 앞에서 다룬 것보다 이전 시기의 얘기가 나오기도 하고 또 어느 대목은 어느 시기를 반영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야훼 하느님이 하신 말씀인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설명이 없이 느닷없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게 누가 한 말인지가 불분명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책에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메시지가, 심지어는 상반되는 메시지가 공존하기도 합니다. 회개하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다가 이젠 회개하기에는 늦어버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가 기도해도 안 들어줄 테니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반되는 주장들이 사람이 한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하느님이 하셨다니, 이걸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사정이 이러하니 우린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예레미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레미야를 설교하길 망설였던 겁니다. 어차피 5책 전체를 다루지는 못할 테고 따라서 몇 가지 주제만 선택해야겠지만 그래도 책 전체의 내용과 관련을 지어서 그렇게 하려니 그게 쉽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매우 매력적인 책이기도

하지만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매력과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예언자’ 예레미야, 더 나아가서 ‘인간’ 예레미야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얘기해줍니다. 사실 다른 예언서들은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데 중점을 두고 있지, 그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가 어떤 사람인지, 아모스와 미가가 어떤 마음의 갈등을 갖고 있었는지, 학개, 스바냐, 스가랴, 말라기 예언자가 메시지를 전하라 명령한 하느님과 자기가 전한 메시지에 대해 어떤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다른 예언서와 비교하면 ‘인간’ 예레미야에 대해 많은 것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언자가 자기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그걸 전하라고 명령한 하느님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자기가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왕, 제사장, 다른 예언자들, 그리고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예언자는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등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예레미야서만 갖고 있는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또 다른 매력은 앞에서 이 책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한 ‘화자(말하는 자)의 불분명성’입니다. 이 책은 소개말 없이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과 내용만 갖고 그 메시지가 누구의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으로도 잘 파악이 안 되기도 합니다. 대체 이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예언자 자신의 말인지 헛갈리는 겁니다. 어떤 학자는 하느님의 말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는 예언자의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요즘 누가 이런 방식으로 책을 편집했다면 그는 당장 해고될 겁니다. 예레미야서는 그 정도로 편집상태가 엉망입니다.

저는 이것이 의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편집자는 바보도 아니고 무능력하거나 나태해서 이렇게 편집한 게 아닙니다. 화자를 모호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독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인지 예언자의 말인지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입니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여기에는 그걸 듣지 못한 분들이 꽤 있으니 한 번 더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예언서를 공부하게 된 계기에 대한 얘기입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보수적인 신학대학원을 반년 다녔습니다. 반년 만에 거기서의 공부는 작파했지만 제게는 의미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 가보니 많은 신학생들이 자기는 하느님과 직접 소통을 하는 듯이 얘기하는 게 아닙니까. 기도의 응답을 확실하게 받았다는 이도 있었고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듯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는 그런 경험을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응답해 달라고 하느님께 무던히 기도도 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기도 응답도 직접 하느님의 음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만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하느님이 나만 미워하시나? 다들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는데 왜 나만 못 듣는 걸까? 왜 하느님이 내게만 냉담하신 걸까?’ 하며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성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공부’해서 알아보기로 작정하고 도서관에 처박혀서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결국은 구약성서를 전공하기로 작정하고 그 중에서도 예언서, 그 중에서도 예레미야서를 집중 연구할 텍스트로 정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 세월 열심히 공부한 잠정적인 결과는 누구도 하늘로부터 음성이 터져 나와 공기를 진동해서 그 파동이 사람의 고막을 때려서 그 자극이 뇌로 전달되어 사람의 언어로 표현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굉장히 파격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이는 저만의 결론은 아니고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이 바로 예레미야서입니다. 우리는 그 책을 이번에 읽으려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의 경계는 확실합니까? 사람과 인조인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의 경계로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모호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들은 정말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일까요? 하느님이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말씀하는 걸 사람이 듣고 그대로 옮겼을까요? 그랬다면 일단 귀로 들은 것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문자화했을까요. 아니면 말씀을 들었던 순간에 필기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곧바로 적었을까요? 예레미야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답을 주지는 않으므로 그걸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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